불교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하여 상주불멸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불변의 어떤 고정된 상태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사물을 반드시 어떤 고정된 상태로 인식하는 버릇이 있다. 물리학도 인간의 사물인식 방식에 따라 사물을 기술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을 관찰할 때 상보적인 양 중 어느 한 쪽(예를 들면 위치와 속도 중 어느 한 쪽)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관찰자의 측정행위가 자연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뜻에서 관찰된 자연은 관찰자가 창조한 것이다. 창조된 것이라고 하든 또는 무엇이라고 하든 측정값이 의미를 가지려면 측정값은 한 번 측정된 이후에는 변화가 없어야 할 것이다.
측정할 때마다 측정값이 달라진다면 ‘내’가 자연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를 말하는 것이 무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에서 무엇을 측정한다는 것은 [측정]l상태>=[측정값]l상태> 와 같은 모양으로 표현되어야만 할 것이다. 여기서 l상태> 란 관찰자가 측정하는 대상을 말한다. 이 대상은 관찰을 할 때나 관찰을 한 후에도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측정] 은 관찰자의 측정행위를 뜻한다. [측정값] 이란 관찰자가 관찰 대상에서 얻은 물리량을 뜻한다. 이 물리량이 바로 관찰자 바라보는 자연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다. 물리학에서는 물리량에 실재 또는 현상을 대응시키므로 측정값이 바로 관찰자가 보는 자연현상을 뜻한다.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어떤 상점에서 물품의 재고(在庫)를 정리한다고 하자. 재고를 정리할 때 상품이 들락거리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재고 파악을 할 때 10상자가 창고 밖으로 나가고 재고를 다 파악하여 100상자가 있다고 장부에 기록하자마자 20상자가 창고 어디서 새로 발견된다면 재고가 100상자라는 것은 의미 없는 값일 것이다. 이렇게 재고 정리를 하여서는 상점경영에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창고에 있는 물품의 숫자에 변동이 없을 때만 100상자라는 값이 의미를 가질 것이다. 의미 있는 재고 파악이라면 [재고파악행위]l창고상태>=[100상자]l창고상태>와 같은 모양으로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을 관찰하는 인간의 측정행위와 측정값을 위와 같이 정의하면 이 정의에 꼭 맞는 수학적 표현이 있다. 변하지 않는 l상태> 를 고유상태(固有狀態)라고 하는데 수학적으로는 고유함수(Eigen-function) 또는 고유벡터(Eigen-vector)라 부르고 측정행위를 연산자(Operator)라 부르고 측정값을 고유값(Eigen-value)이라고 부른다. 자연을 측정하여 측정값을 얻는다는 것은 고유상태에서 고유값을 얻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양자역학에서 인간의 사물인식 방식에 맞추어 사물을 기술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실제 자연에 불변의 고유값을 갖는 고정된 상태는 없다. 인간이 고유상태라고 느끼는 것은 잠정적으로 고정된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다. 실제의 자연은 영화(映畵)의 움직이는 화면처럼 인과의 법칙에 따라 사건들이 전개되는 변화의 과정일 뿐이다. 세상은 사건의 흐름일 뿐이다.
인간은 사건의 흐름 중 어느 하나에 매달려 그 ‘하나’가 실재한다고 생각하고 그 하나의 고유성에 대해 얘기한다. 그러나 고유값을 갖는 고정된 상태란 영화필름 중의 어떤 고정된 하나의 장면처럼 허구다. 여기서 여러 가지 역설이 일어난다.
김성구 이화여대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1016호 [2009년 09월 28일 16: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