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아함경』의 「천타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혹은 있다. 혹은 없다’라는 두 극단(極端)에 의해서 미혹한다. 모든 경계를 취하기 때문에 마음이 곧 분별해 집착한다. (…중략…) 세간의 발생을 관찰하면 세간이 없다는 견해가 없을 수 없고 세간의 소멸을 관찰하면 세간이 있다는 견해가 있을 수 없다. 여래는 상주(常住)와 단멸(斷滅)의 양 끝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취한다.”
‘이것’과 ‘이것 아닌 것’으로 나누는 것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인간적 지혜의 바탕이다. 논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있는 것’이 아니면 ‘없는 것’이고 ‘영원히 존속하는 것’이 아니면 ‘소멸하여 없어지는 것’이지 이 두 가지 모두를 버리고 어떻게 중도를 취할 수 있는가 하고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인간의 사유법칙에는 중도란 없다.
불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설법은 무척 논리적이다. 장로 나가세나는 논리로 잘 무장한 그리스인의 왕 메난드로스를 논파할 정도로 불교의 교설(敎說)은 논리적이다. 언어로 설하는 한 논리에 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교설일 수가 없다. 그런데 왜 중도를 설했을까? 중도가 사물의 실상(實相)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수도승과 같은 깨달음이 없더라도 자연을 관찰하면 극단을 취하는 것은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일 뿐 자연은 극단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어도 양자역학이 기술하는 자연은 두 개의 극단 중 어느 하나만을 취하지 않는다.
인간의 사물인식 방식은 사물에서 고유성(固有性)을 보는 것이다. 지난번에 설명한 바와 같이 양자역학에서는 고유성을 가진 사물의 상태를 고유상태라 부르고 이 상태를 고유함수로 표현한다. 그런데 하나의 사물은 여러 가지의 고유 상태를 가질 수 있다. 고양이의 생사(生死)를 관찰한다면 사람은 ‘삶’과 ‘죽음’ 중 어느 하나의 상태만을 보게 될 것이다. ‘삶’도 고양이의 고유상태이고 ‘죽음’도 고유상태다.
그런데 양자역학에서는 삶의 상태와 죽음의 상태가 허용된다면 삶과 죽음이 섞인 상태도 허용된다. 삶과 죽음은 가능한 상태의 양 극단일 뿐 삶과 죽음의 중첩상태가 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것이다. 물론 고양이의 삶과 죽음은 비유이지만 미시세계에서는 입자의 상태는 가능한 상태들이 중첩(重疊)되어 있다.
팽이가 돌 때 돌아가는 빠르기의 크기를 나타내는 값을 스핀(spin)이라고 한다. 팽이의 도는 세기가 일정할 때 스핀의 값은 팽이가 시계방향으로 도느냐 아니면 반대방향으로 도느냐에 따라 (+)나 (-)의 두 가지 값 중 어느 하나를 가질 수 있다. 둘 다의 값을 가질 수는 없다. 그런데 전자나 빛-알갱이 같은 소립자들은 스핀 값이 중첩상태에 있게 된다. 측정하면 반드시 (+)와 (-) 중 하나의 값을 갖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측정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와 (-)가 겹쳐 있는 상태로 행동한다. 논리적으로는 고양이가 죽어 있기도 하고 살아 있기도 한 것과 마찬가지다.
중도란 중간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을 다 포용하고 포함한 상태를 가리킨다. 모든 것을 허용하는 이러한 상태는 확률파처럼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 거기서 단멸도 볼 수 있고 상주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상주도 아니고 단멸도 아닌 空일뿐이다. 그것이 물리학적으로 풀어본 중도요 空의 이치다.
김성구 이화여대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1018호 [2009년 10월 12일 1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