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아함경』의 「도경(度經)」을 보면 부처님은 강력한 어조로 숙명론(宿命論)과 우연론(偶然論) 및 존우(尊祐)의 화작설(化作說)을 배격한다. 세상일은 숙명적으로 미리 결정된 것도 아니고 우연에 의한 것도 아니며 신의 섭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일은 연기적 관계에 의해 인(因)과 연(緣)에 따라 일어나며 인간의 노력과 의지도 여기에 작용한다는 뜻이다. 인(因)과 과(果)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얽혀 있어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의 법칙은 복합적이다. 그렇다면 과학은 인과율을 어떻게 볼까?
뉴턴의 고전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수학적 구조는 모두 결정론적 인과율을 따르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물질적 측면에서 본 우주는 하나의 커다란 기계일 것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세상을 기계로 보지 않는다. 양자역학의 이론과 실험에 대한 해석을 코펜하겐해석(Copenhagen Interpretation)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자역학은 관찰자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를 부정한다. 불확정성 원리에 따라 관찰자의 관찰행위가 관찰결과에 영향을 미치게 되니 관찰자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를 부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관찰자가 관측한 것, 사람이 보는 것은 무엇이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
물리계의 모든 정보는 파동함수에 있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파동함수는 사람이 관찰할 수 있는 모든 상태를 포함하고 있다. 즉 파동함수는 무수히 많은 고유 상태의 합으로 표시된다. 사람이 물리계에 대해 측정을 한다는 것은 이 고유 상태 중 어느 하나를 보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수많은 고유 상태 중 어느 것을 보게 될지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여기에 대해서는 확률적으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에 대해 아인슈타인이 “하느님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반발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확률론적 인과율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스핀의 상태를 예로 들겠다. 전자나 빛-알갱이 같은 소립자의 경우 파동함수는 (+)부호를 갖는 스핀상태와 (-)부호를 갖는 스핀상태의 중첩으로 되어 있다. 이 둘 어느 상태를 보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확률론적이다. (+)부호의 상태를 측정할 수도 있고 (-)부호의 상태를 측정할 수도 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 확률은 1/2이다. 그런데 파동함수 중에서 어느 상태를 보느냐하는 것은 확률론적이지만 파동함수 자체는 결정론적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양자역학이 말하는 인과율은 결정론과 확률론의 결합이다. 보통 양자역학을 얘기할 때는 확률론적 인과율만을 말하지만 정확히 얘기하자면 둘의 결합이다. 뿐만 아니라 관측자의 선택도 작용한다. 왜냐하면 어떤 상태를 보느냐하는 것은 상보적인 물리량 중 관찰자가 어떤 물리량을 볼 것이지를 결정한 다음에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관찰자가 먼저 위치(상태)를 측정할 것인지 속도(상태에서 벗어나려는 경향)를 측정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관찰자가 선택하는 것이다.
연기로 얽힌 세계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 결정론, 우연론이 다 섞여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진행된다. 인간의 지혜로 말하기가 참으로 힘든 것이 연기의 법칙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연기의 바다는 깊고 깊다”라고 설한 것이다.
김성구 이화여대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1023호 [2009년 11월 16일 1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