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설경(自說經)』에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우화(寓話)가 있다. 코끼리 전체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장님들이 코끼리를 가리켜 머리를 만져본 장님은 ‘물 항아리’, 귀를 만져본 이는 ‘키질하는 키’, 상아를 만져본 이는 ‘쟁기’, 코를 만져본 이는 ‘쟁기막대기’, 몸통을 만져본 이는 ‘벽’ 등, 장님은 저마다 코끼리를 다르게 묘사하였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만큼 불교의 본질을 분명히 해주고 불교와 그 외의 모든 철학과의 구별을 확실히 해주는 것은 없다. 또한 이 우화는 양자역학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코끼리 전체의 모습이 중도(中道)를 나타낸다. 이를 줄여서 중(中)이라 하고 머리, 귀 등 부분의 모습을 변(邊)이라고 한다. 코끼리를 물리계에 빗대어 말하면 ‘중’이 파동함수요, ‘변’이 고유상태를 나타내는 고유함수에 해당한다.
물리계의 모든 정보는 파동함수에 있고 파동함수는 고유함수의 합으로 표시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측정을 통해 보는 것은 고유상태다. 장님이 만져보는 것도 코끼리의 일부분인 ‘변’이다. 고유상태 중 어느 상태를 보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연으로 확률론적으로만 말할 수 있다. 장님이 코끼리의 어느 부분을 만지게 되느냐하는 것도 확률론적으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장님은 누구나 다 논쟁이 되는 대상의 일부분을 만져보고 자신이 가진 유한한 능력이 허락하는 한계 내에서 바르게 서술하고 있다. 사람이 세상을 보고 세상에 대한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능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보고 바르게 서술하고 있다. 모두 다 어떤 한계 내에서는 맞고 모두 다 어떤 한계를 넘어서면 틀린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십리나 백리를 움직이는 사람에게는 지구가 평평하다. 하루를 시작할 때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말은 옳은 말이다. 천동설(天動說)은 절대적으로 틀리고 지동설(地動說)은 절대적으로 맞는 것 같지만 어떤 한계 내에서는 천동설도 맞는다. 어떤 한계를 벗어나면 지동설도 새로운 관점, 시공간의 구조라는 새로운 틀로 대치된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는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 성행하던 외도(外道)의 사상을 평(評)하기 위해 부처님이 만든 우화이다. 부처님에 의하면 불교 외의 다른 철학이나 외면적 지식 등에 의해서 사물을 인식하고 설명하는 것이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니다. 이들 철학이나 외면적 진리는 유한한 견지에서 진리를 바르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견을 말하는 사람이 잘못이라고 한다면 이 견지가 유한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절대적 진리라고 믿고 고집하는 데에 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원자 이하의 물리계는 고유상태가 중첩되어 있다. 작은 팽이(spin)는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동시에 반시계방향으로 돌기도 한다. 전기 스위치가 켜져 있으면서 동시에 꺼져 있기도 하다. 이것을 이용한 것이 양자컴퓨터다. 양자컴퓨터는 아직 연구실 수준에서이지만 실제로 작동을 한다. 사람은 고유상태가 중첩되어 있는 파동함수를 직접 관찰하거나 체험할 수는 없다. 파동함수를 체험한다면 삶과 죽음이 반씩 섞인 고양이를 보는 것과 논리적으로 꼭 같다. ‘삶’도 ‘변(邊)’이고 ‘죽음’도 ‘변’이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 것이 열반이요 부처의 경지다. 그리고 그것이 중도다.
김성구 이화여대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1027호 [2009년 12월 14일 17: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