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장』 『대품』과 『증일아함경』 19권 「권청품」에 유명한 범천권청(梵天勸請)의 법문이 나온다. “내가 깨달은 이 법은 매우 심오하여 보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고 미묘하며 심원하여 사고의 영역을 초월해 있어서 오직 청정한 지혜를 갖춘 자 만이 이해할 수 있다. 알라야(阿賴耶, 탐욕과 탐착)를 사랑하고 알라야를 즐기며 알라야를 기뻐하고 알라야에 춤추는 중생은 이 연기의 이치를 보기 어렵고 열반의 이치를 볼 수 없다. 만약 내가 이 법을 전한다 해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나만 지치게 될 것이다.”
부처님과는 물론 그 격이 다르겠지만 물리학자 보아(N. Bohr)도 부처님과 비슷한 말을 한다. “양자론에 충격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직 양자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다.” 양자역학은 물리이론으로서 말할 수 없이 성공적이지만 인간의 사물인식방식으로는 그 내용을 이해하기 참으로 어렵기 때문에 나온 소리이다. 아무리 이해하기 어려워도 꼭 인간의 사물인식 방식으로 이해하고 싶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야 수없이 많지만 이중성과 파동의 중첩이 어떻게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이해해보려고 시도하는 것은 뜻있는 일일 것이다. 문제를 간단하게 하기 위하여 두개의 고유 상태를 가진 시스템을 생각하자. 먼저 옆 그림을 보자. 그림에서 ‘젊은 여인’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노파’도 보인다. 하나의 그림 속에 ‘젊음’ 과 ‘늙음’의 두 상태가 분명히 공존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이 볼 때는 둘 중 하나만 보게 된다. ‘젊은 여인’이라는 고유상태를 보거나 ‘노파’라는 고유상태를 보는 것이다. 둘을 동시에 보는 일은 결코 없다.
‘젊음-늙음’은 논리적으로 대립되는 개념이다. 젊음-늙음의 이중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젊음’과 ‘늙음’의 중첩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젊음-늙음’의 짝은 논리적으로 ‘삶-죽음’의 짝과도 같다. 그림에서 ‘젊음-늙음’이 공존하듯이 파동함수는 물리계의 모든 정보를 갖고 있고 무수히 많은 가능한 모든 상태를 포함하고 있다. 중도의 원리가 말하는 진리 역시 가능한 모든 것을 다 포용하고 포함하고 있다.
인간의 정신도 다중적(多重的)이다. 무엇인가를 결정하기 이전의 사람의 마음상태는 여러 가지 생각이 의식아래에 중첩되어 있다. 의식의 문턱 아래에서 반쯤만 형성된 생각들이 떠돌아다니지만 우리의 마음은 이들을 동시에 이해하고 있다. A를 선택할까 B를 선택할까 하고 망설이는 가운데서도 다른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어떤 생각이 구체화되면서 의식의 전면에 등장하고 행동을 하게 된다. 생각은 전의식 상태에서 중첩상태로 있다가 마음이라는 파동함수가 붕괴되는 순간 의식으로 진입한다.
‘젊은 여인’과 ‘노파’ 중에서 어느 쪽을 보느냐 하는 것은 우연일 수도 있고 보는 자의 선택일 수도 있다. 또는 상황에 따라 결정된 것일 수도 있다. 불교적 인과 역시 굳이 분석하면 우연론과 결정론과 인간의 의지와 창조(唯心造)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김성구 이화여대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1030호 [2010년 01월 04일 17: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