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양 극단을 떠나 중도(中道)를 취한다고 설하셨다. 중도를 물리학적으로 해석하면 중간이나 평균이 아니고 중첩(重疊, Superposition)이라는 것을 지난번에 설명하였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이 중첩이고 여러 가지 가능성을 다 포용하고 수용하는 것이 중도다. 그렇다면 중도의 윤리적 의미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선(善)과 악(惡)도 다 포용하고 수용하라는 것인가? 부처님의 설법과 행함에서 답을 찾는다면 맡은 바 직무를 다하는 것이 중도임을 알 수 있다.
악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일 뿐 절대 악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악은 아무래도 살도음(殺盜淫)과 망언(妄言)일 것이다. 이 네 가지 잘못을 모두 저지르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보다 더한 악인(惡人)은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을 보는 눈은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 사회 질서유지를 책임진 판관(判官)과 경찰이라면 마땅히 이 사람에게 죄를 묻고 법에 따라 처리하여야 할 것이다. 판관과는 달리 이 사람이 이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잘 알고 있는 어머니가 본다면 이 사람을 미워하기보다는 이 사람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생각하고는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의 잘못을 책하기 보다는 용서를 구하고 싶을 것이다. 이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줄 신(神)이 있다면 신에게 빌고 기도를 올릴 것이다. 그런데 정신과 의사의 입장에서 보면 이 사람의 잘못이란 치료를 받아야 할 병(病)에서 온 것이다. 병의 치료가 가장 급한 일이다. 병이 사랑의 결핍에서 온 것이라면 사랑을 베푸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일 것이고 어리석음에서 온 것이라면 인과의 이치를 설명하고 ‘고(苦)’의 원인을 깨닫게 도와주는 것일 것이다.
어머니의 태도는 옳다. 그 태도는 사랑에서 온 것이다. 그것도 무조건적인 사랑에서 온 것이다. 이 사랑을 나무랄 수는 없다. 이 사랑이 중생 모두에게로 향할 때 그것을 보살의 자비심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잘못을 그냥 덮어 둘 수는 없다. 고쳐야 한다. 잘못은 무지(無知)에서 오는 병(病)이다. 이 병을 고치는 것이 불교의 교설(敎說)이요 수행(修行)이다.
불교의 자비가 모든 것을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이라고 해서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도 그냥 두라는 것이 아니다. 판관과 경찰도 옳다. 질서 유지의 책임을 맡고 있는 판관과 경찰이 선악시비(善惡是非)의 판별에 어둡고 법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사회질서는 유지되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도 승가의 화합을 위해 계와 율을 만들고 이를 엄격히 지켰다.
승가뿐만 아니라 인간사회나 동물이나 개미와 벌도 질서유지를 위해 규칙을 엄격히 지킨다. 다만 판관과 경찰의 역할을 맡은 사람이 증오의 감정으로 상대방을 다룬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자비심으로 대하여야 할 것이다. 책(責)하고 벌하되 자비심으로 이끌어야 할 것이다. 미움과 복수로 세상일을 해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느 것 하나만 옳다고 주장하고 그것만 행한다면 그것은 극단에 빠진 것이요 무지요 어리석음이다. 각자의 맡은 바 역할을 충실히 하고 남의 역할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 그것이 파동함수의 중첩의 원리에서 풀어본 중도의 윤리다.
김성구 교수 이화여대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1020호 [2009년 10월 27일 10: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