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불교에 미진경권유(微塵經卷喩)라는 말이 있다. 하나의 티끌 속에도 삼천대천세계와 같은 경권(經卷)이 있어 모든 진리가 숨어 있는데 아무도 모르고 있었지만 어떤 눈 밝은 사람이 이것을 알고 끄집어내어 사람들에게 진리를 알린다는 뜻이다. 알고 보면 삼라만상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진리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라는 말도 나왔을 것이다. 사실 자연을 관찰하면 하나의 티끌에도 일체의 진리가 숨어있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흑체복사(黑體輻射, Blackbody Radiation)가 좋은 예일 것이다.
흑체란 빛을 100% 흡수하는 물체를 가리킨다. 일정한 온도 하에서 흑체는 빛을 100% 흡수하고 흡수한 빛을 100% 방출한다. 이상적인 흑체는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지만 아무 물체든지 그 중심에 공동(空洞, Cavity)을 뚫어 놓으면 이 공동은 흑체처럼 행동한다. 공동을 이용하면 어떤 물체든지 흑체로 볼 수 있는 것이다.
20세기 초의 물리학자들은 별로 할 일이 없었다. 뉴턴의 고전역학과 막스웰의 고전전자기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물리현상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고전물리학으로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 몇 가지 있었지만 당시의 물리학자들은 이것들을 대수롭게 여기지는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물리학자들은 흑체에서 나오는 빛의 스펙트럼(Spectrum, 파장에 따른 빛의 성분)을 분석하고 각 빛의 성분이 갖는 세기를 측정하였다.
그리고 온도의 변화에 따른 스펙트럼의 변화를 조사하였다. 흑체복사의 성질을 조사하는데 있어서 실험적으로 어려운 점은 전혀 없었다. 이론적으로 실험결과를 설명하면 흑체복사에 관한 물리학자들의 연구도 완성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전물리학적 이론으로 계산하면 흑체복사의 에너지 총량은 무한대가 되었다. 이것은 고전 물리학의 이론이 흑체복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완전히 틀렸음을 의미한다.
흑체복사를 설명하기 위해 독일의 물리학자 플랑크(Max Planck, 1858-1947)는 1901년 양자가설을 제안 하였다. 빛을 에너지의 덩어리(量子, Quantum)로, 즉 입자라고 보자는 것이다. 흑체에서 나오는 빛이 에너지의 덩어리로 이루어졌다고 가정하면 흑체복사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플랑크 자신을 포함하여 당시의 물리학자들은 아무도 정말로 빛이 입자로서 행동한다고 믿지는 않았다. 입자와 파동은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성질을 갖기 때문이다.
양자가설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빛을 입자라고 보고 당시의 물리학자들에게 수수께끼 같았던 현상, 빛이 진공관의 한쪽 금속판을 때리면 진공관에 전기가 흐르는 현상(광전효과, Photoelectric Effect)을 완벽하게 설명한 사람은 아인슈타인이었다. 아인슈타인도 정말 빛이 입자라고 믿지는 않았다고 훗날 고백한다.
이후 빛뿐만 아니라 모든 입자들이 이중성을 갖는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양자역학이 탄생하게 되었음은 이미 설명한 바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보이는 현상에서 이중성을 발견하고 이로 인해 현대물리학이 탄생하게 되었으니 미진경권유는 참으로 옳은 말이다. 하나의 티끌 속에도 일체의 진리가 들어 있다면 마음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김성구 이화여대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1014호 [2009년 09월 15일 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