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마가·누가·요한 4복음서에 행적 기록
성경 속 동방박사는 조로아스터교 제사장
30세에 침례 받고 광야에서 금식 기도
법보신문 편집인으로부터 불자들이 세계 여러 종교의 기본 가르침에 접함으로 다른 종교들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세계 여러 종교의 위대한 스승들을 좀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훌륭한 제안이라 생각하고 이에 응하기로 했습니다.
19세기 중반에 등장한 ‘종교학’의 창시자라고 여겨지는 맥스 뮐러는 “하나의 종교만을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내 자신의 종교를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남의 종교를 알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또 오늘 같은 다원 사회에서 내 종교만 절대적이라는 배타적인 태도를 지양하고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과 함께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협력하는 일은 오늘을 사는 모든 종교인들이 관심 가져야 할 최대의 당면 과제 중 하나라 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불교 이외의 종교 창시자들이나 지도자들의 삶과 가르침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합니다. 우선 한국에서 불자들 주위에서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신봉하는 그리스도교의 창시자 예수님에 대해 먼저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우리나라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하여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는 몇 회에 걸쳐 좀 상세하게 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보통 ‘부처님’이라고 하듯 적어도 ‘예수님’ ‘공자님’ ‘노자님’ 등 세계 종교 창시자에 대해서는 ‘님’자를 붙이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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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리타의 성모'. 레닌그라드 에르미타지 미술관 소장. |
‘창시자 예수’라고 했지만, 정확하게 따지면 예수님은 그리스도교를 창시하지 않았다. 엄격히 말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도교’니 ‘그리스도인’이니 하는 말도 모르고 어디까지나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유대인으로 살다가 유대인으로 죽은 셈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근간으로 한 종교라 할 수 있고 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면 그리스도교가 있을 수 없었다는 뜻에서 그를 창시자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출생과 성장
예수님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 나오는 네 가지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외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학자들 중 그의 역사성 자체를 부인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단 이 사복음서에 의존해서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알아볼 수밖에 없는 셈이다.
사복음서 중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예수님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두 복음서의 기록이 서로 상충해서 예수님의 출생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기록을 그대로 따르기로 할 경우, 예수님의 출생연대가 대략 기원전 4년경이었으리라 보고 있다.
예수님의 출생을 이야기하고 있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약혼만 한 처녀 상태에서 성령으로 임신을 했다는 것과 그가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곳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이다. 마리아의 약혼자는 목수 요셉이었다고 한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아기가 태어났을 때 동방에서 별을 보고 ‘동방 박사’들이 선물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지고 아기를 경배하러 찾아왔다고 한다. 여기서 동방박사들이란 조로아스터교의 제사장들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그 당시 왕 헤롯이 아기를 죽이려 하니 아기와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라고 일러주었다는 것이다.
이집트로 간 세 식구는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서 살다가 헤롯이 죽고 갈리리 지방 나사렛이라는 동네로 가서 살게 되었다. 20세기 최대의 그리스도교 사상가 중 하나로 여겨지는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이 이야기를 문맥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예수님과 그 부모들이 이집트로 가서 동방박사들이 가져단 준 선물을 팔아 생계를 이어갔으리라 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리스도교 시작에 ‘동방에서부터의 선물’이 이처럼 중요했던 것처럼 2천년이 지난 오늘 다시 그리스도교에 동방으로부터의 선물이 필요하다고 보고 이 선물이 바로 선불교나 노장철학과 같은 동양의 정신적 유산이라 보았다.
누가복음에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아기가 태어나던 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천사들의 기별을 받고 아기를 찾아와 구유에 누인 아기를 경배했다. 태어난 아기는 규례대로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에서 봉헌식을 치루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경건한 사람이 있었는데,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 아기가 오는 것을 보고 받아 안고 “주님, 이제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이 종을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가게 해주십니다.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모든 백성 앞에 마련하셨으니, 이는 이방 사람들에게는 계시하시는 빛이요,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2:29-32)하는 말을 했다. 부처님이 태어났을 때 아시타 선인이 아기에게 와서 한 말을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자라나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은 사복음서 모두가 공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갈릴리는 정통 유대인들로부터 차별대우를 받는 곳이었다. 예수님의 성장기에 대한 이야기는 누가복음에 잠깐 언급된 것 이외에 없다.
누가복음에 보면 그가 열두 살 때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으로 유월절을 지키러 갔다가 부모가 집으로 가는 것도 모르고 성전에 남아서 종교 지도자들과 『토라』에 대해 토의를 했는데, “모두 그의 슬기와 대답에 경탄하였다”(2:47)는 것이다. 길을 가다가 그를 찾으러 되돌아 온 어머니 마리아를 보고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했다.(2:49)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2:52)
침례와 시험
세계 종교사적으로 그렇게도 중요한 그 ‘30세’가 되어 예수님은 침례 요한에게 가서 침례를 받았다. 그 당시는 물을 뿌리거나 바르는 ‘세례’가 아니라 전신이 요단강 강물에 잠기는 ‘침례’였다. 예수님도 물에 잠겼다 올라오는데,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는 것을 보게 되고, 또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영적 눈과 귀가 열린 체험이라 할 수 있다.
침례를 받은 후 곧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광야로 나가 40일간 금식과 기도로 시간을 보냈다. 40일이 지난 후 예수님이 사탄의 시험을 받았다고 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그 시험이 세 가지였다고 하는데, 둘째와 셋째 시험의 순서가 각각 다르다. 마태복음의 순서대로 하면 첫째 시험은 사탄이 와서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돌들을 떡덩이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마4:4)하는 히브리 성경의 말씀으로 이 유혹을 물리쳤다.
둘째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아래로 뛰어내리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는 말씀으로 이 시험도 이겼다. 셋째는 사탄이 예수님을 산꼭대기로 데리고 가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고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는 말씀으로 사탄을 물리쳤다.
이 시험을 요즘 말로 고치면, 순서에 따라 경제적, 종교적, 정치적 유혹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이런 유혹을 모두 물리쳤다고 하는 것은 참된 종교의 목적이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처럼 경제적인 이득을 추구하는 것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 것 같은 초능력을 발휘하는 것도, 막강한 영광과 권위로 세상을 휘어잡고 세상에 군림하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삶에서 침례와 시험이라고 하는 이 두 가지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그에게 궁극 실재와의 새로운 관계에서 가능한 ‘의식의 변화’(transformation)를 가져다 준 체험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해주는 이야기라 볼 수 있다. 이런 ‘특수 인식능력의 활성화’를 통해 지금까지의 일상적 세계관이나 가치관에서 완전히 ‘비보통적인’ 것으로 바뀌는 체험이다. 이제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오 ‘말씀(로고스)’ 곧 우주와 삶의 참다운 ‘뜻’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도 ‘깨치신 분’ 곧 ‘성불하신 분’이라 볼 수는 없을까? 예수님 뿐 아니라 종교사를 통해서 볼 때, 붓다를 위시하여 무함마드나 최제우 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은 이런 특수 체험을 통해 새로운 의식과 확신으로 거듭 나게 되고, 이런 일이 가능한 후에 그 체험을 행동으로 옮겨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soft103@hotmail.com
오강남 교수는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및 동 대학원에서 서양 종교사상을 전공하고 캐나다 맥매스터(McMaster) 대학에서 ‘화엄(華嚴)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에서 27년 동안 비교종교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 밴쿠버 신학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 『도덕경』『장자』『예수는 없다』『불교, 이웃종교로 읽다』등이 있고, 역서로 『예수의 기도』등 다수가 있다.
출처 법보신문 933호 [2008년 01월 14일 1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