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의 실상(實相)인 ‘공’을 말로 설명하고 머리로 이해를 한다고 해서 내 안의 무엇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공(空)은 체득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아니고 말로 설명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도 아니다. 지도(地圖)가 지구(地球)는 아니지만 지도가 있으면 자기가 있는 곳의 위치를 알 수 있고 나아갈 방향을 잡을 수 있듯이 공을 머리로 이해하면 정법과 정법 아닌 것을 구별하는 눈을 뜨게 한다.
양자역학이 입자-파동의 이중성을 통해 나타나는 파동을 확률파라고 해석함으로써 물질의 공상(空相)을 훌륭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특수상대성이론은 색즉시공이 빈말이 아님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진공(眞空, vacuum)에서 물질(色)이 나오고 물질이 소멸할 수 있음을 수학적 공식(公式)을 통해 보여준다. 그 공식이 바로 저 유명한 E=mc²이다.
사람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것을 실체(實體)가 있는 실재(實在)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몸이 움직일 때 우리는 몸은 실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몸짓을 실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주위에는 분명히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물질이 있다. 이것들은 질량(質量)을 갖고 있어 무게를 느끼게 해주며, 일정한 범위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어 다른 물체가 움직이는 것에 대해 장애물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질량을 가진 물체를 움직이면 거기에는 에너지라는 물리량이 따른다. 몸짓에 아무런 실체가 없듯이 에너지도 어떤 형체를 갖지 않는다. 에너지를 구체적으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 상황에 따라 에너지에 어떤 이름을 붙일 뿐이다. 물체가 운동하면 물체가 운동에너지를 갖는다고 말한다. 어떤 물체가 빠르게 움직이면 이 물체가 정지해 있을 때보다 큰 운동에너지를 갖는다하고 느리게 움직이면 보다 작은 운동에너지를 갖는다고 한다.
그러나 빨리 움직이든 느리게 움직이든 물체의 실재성에 무슨 근본적인 변동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저 운동 상태가 바뀌었다고 말할 뿐이다. 운동에너지란 단순히 물체의 운동 상태를 나타내는데 필요한 척도 중 하나일 뿐이다. 또한 지상에서 물체의 높이를 바꾸어주면 낮은 곳에 있을 때는 물체가 갖는 위치에너지가 작으며 보다 높은 곳에 있을 때는 보다 큰 위치에너지를 갖는다고 말한다. 이 경우에도 위치에너지는 물체의 위치가 변한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척도일 뿐 위치에너지라는 것이 실재하는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일상 경험 세계에서 볼 때 에너지는 우리에게 빛과 열을 전해주기도 하고 물체의 운동 상태나 위치를 바꾸어 주는 역할을 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모습을 갖지는 않는다. 에너지는 그 크기를 나타내는 양(量)만을 가질 뿐 어떤 형체를 갖지 않아서 추상적인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몸과 몸짓은 실재성이라는 면에서 볼 때 완전히 다른 것 같지만 E=mc²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질량이 있는 입자가 사라지는 대신 에너지가 생겨날 수 있고 에너지가 변하여 질량을 가진 입자로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한다. 질량을 가진 입자가 역시 에너지의 특수한 형태임을 뜻한다. 비유컨대 몸과 몸짓이 서로 바뀔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 경험의 세계에서 허(虛)와 실(實)로 나눈 것이 ‘아(我)’의 관점에 따라 때로는 ‘실(實, 몸)’로 보기도 하고 ‘허(虛, 몸짓)’로 보기도 하는 것이다.
김성구 이화여대 명예교수
출처 법보신문 1072호 [2010년 11월 16일 1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