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불교와 자연과학

44. 인과응보와 법칙 없는 법칙

slowdream 2010. 12. 27. 00:12
44. 인과응보와 법칙 없는 법칙
 
인과율 따라 제멋대로 삶의 사건들 발생해
아뢰야식에 저장…과보로 나타난 것이 응보
 
출처 법보신문 / 2010.12.14 19:39 입력 발행호수 : 1076 호 / 발행일 : 2010년 12월 15일

 

불교윤리의 바탕은 인과응보사상이다. “착한 일에는 즐거움이, 악한 일에는 괴로움이 과보로서 따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일을 살펴보면 악인(惡人)이 잘 되고 착하고 선한 일을 한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비참하게 되는 경우를 가끔 볼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르고 어떤 잘못도 저지른 적이 없는 어린아이가 굶주리고 심지어는 학살되는 일도 있다. 이런 것을 보고서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부정한다. 세상에 신(神)이나 천도(天道) 또는 정법(正法)이 있다면 이럴 수 없다는 것이 종교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자연의 생태계와 그 일부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삶을 살펴보면 이 사람들의 생각에 머리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생태계에서는 힘이 곧 선(善)이다. 힘뿐만이 아니다. 속이는 것도 살아가는 훌륭한 수단이다. 어떤 종류의 딱정벌레는 개미집에 들어가서 개미를 속여 먹이를 얻어먹고 개미의 유충을 잡아먹는다. 동물 세계에선 형제끼리 싸우고 죽이는 일도 드문 일이 아니다. 약육강식이 생태계의 법이요 삶의 원리다. 동물사회에도 동료애가 있고 이타적인 행동이 있기는 하지만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데에는 예외가 없다. 생존경쟁을 통한 적자생존이 삶의 법칙이다. 싸워서 이기는 자가 살아남는 것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세계 역시 생태계의 한 부분으로서 동물세계와 크게 다를 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악행이 유능한 행위처럼 여겨지고 선행이 어리석은 행위처럼 여겨지는 경우를 모든 나라의 역사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아첨과 권모술수가 권력의 바탕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천도나 정법이라고 하는 것’에 힘이 없는 것도 아니다. 정도를 걷는 사람은 칭송받고 큰 보상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아득한 옛날의 일부터 시작하여 당대까지의 중국역사를 기술한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기원전 145년?~기원전 86년?)은 이렇게 물었다.


“천도란 있는 것인가? 있다면 그것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인과응보는 옳은 것 같기도 하고 그른 것 같기도 하니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한 답은 의외로 물리학에서 유추할 수 있다. 양자역학적으로 보면 빛은 어떤 주어진 법칙이 있어 두 점사이의 직선거리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사실 빛은 제멋대로 움직인다.


빛의 존재 가능성을 나타내는, 실체 없는 확률파가 빛이 갈 수 있는 가능한 모든 경로를 따라 전파된다. 그런데 빛이 갈 수 있는 모든 경로에 존재하는 확률파를 합쳐놓으면 빛은 직선거리를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입자들도 마찬가지다. 미시적으로 보면 제멋대로 행동했는데 거시적으로 보면 어김없는 법칙을 따라 움직인 것처럼 보인다. 빛을 포함하여 모든 소립자는 법칙 없는 법칙을 따라 움직인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법칙 없는 법칙’을 물리학적 공식으로 정립한 것이 화인만의 경로적분이다(3월23일자 2면 칼럼 참조).


‘법칙 없는 법칙’에서 유추하면 삶에서 일어나는 하나하나의 사건은 확률론적 인과율에 따라 제멋대로 일어난다. 그런데 이 사건들의 모임은 질서정연한 인과의 법칙을 따르게 된다. 개인의 경험에 관한 것이라면 사건들은 아뢰야식에 빠짐없이 저장되고 저장된 정보는 윤회를 통해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어김없이 과보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물리학에서 유추한 인과응보의 법칙이다.


김성구 교수 이화여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