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지난 몇 년간 채식(육식)을 주제로 하는 논문들을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글은 채식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이거나 불교의 역사와 교리 속에서 채식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현실은, 불교종립학교인 동국대에서조차 채식 식단을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다. 한식과 양식 사이에서 선택할 수는 있어도, 육식과 채식 사이에서 선택할 자유는 제공되고 있지 않다. 불교를 장려하는 대학교라 할지라도 채식을 하나의 바람직한 선택으로 설정조차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현재 대부분의 불교계 인구가 채식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채식이라는 주제를 ‘학술적이지 않은’ 방식으로도 이야기할 필요를 느낀다. 연구자가 자신을 최대한 연루시키지 않는 기존의 객관주의적(?) 방식으로 글을 쓴다면 채식 문제에 관한 어떠한 논의도 추상적인 수준에서 머물게 될 우려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게다가 채식과 관련된 웬만한 이슈들은 《불교평론》에서도 이미 상당히 다루어져 온 것 같다. 논의와 토론은 객관적 지식을 위주로 하고 실천적 고민은 각자 사적인 차원에서 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사적 고민 자체를 객관적 토론으로 가져와 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우선, 나에게 채식이라는 것이 어떤 경험적인 맥락 속에 자리 잡고 있는지, 그래서 나에게 채식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즉 본인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 봄으로써 그간의 추상적이기만 하던 논의의 차원을 좀 더 구체화해 보고자 한다. 다음으로는 본인이 불교 수행자로서 채식의 문제를 내 삶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있는지를 드러내고자 한다. 역설적이게도 수행적 관점이 도리어 내게는 채식을 놓아 버리게 하는 효과가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아직 진행 중인 고민들을 공유함으로써 토론의 장을 열고자 한다. 채식의 문제는 그 어떤 문제보다도 일상적 실천에 밀접한 것이어서 사회이론적 차원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사적인 삶의 차원에서 함께 고민이 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2. 나에게 채식은 무엇인가
우선 나는 육식생활을 35년이나 해 온 후에야 채식을 진지하게 고려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그리고 지난 10년간 채식인으로 살아왔지만 현재 시점에서 내가 실천하는 채식의 수준은 고기와 생선을 안 먹고 우유와 계란은 따로 사 먹지 않지만, 국물이나 과자, 빵 등에 포함되어 있는 동물성 성분을 적극적으로 피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매우 느슨한 채식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을 위해 공동의 메뉴에 개입하지 않고 흐름을 따라가기도 한다. 어쩌면 지난 세월 동안 채식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보다는 채식에 대해 고민하고 글을 쓴 시간이 더 많았다고 할 수도 있다.
내가 채식을 시작한 계기는 대학원 수업에서 인간과 자연의 동반자적 관계에 대한 리포트를 준비하면서 몇 권의 책을 통해 가축제도의 억압성을 실감하면서부터였는데, 문득 파트너십이라는 개념이 너무나 가소로워짐을 느끼게 되었다. 인간과 가축의 관계는 말 그대로 주인과 노예의 관계인데, 여기에서 파트너십을 말한다는 것은 내 상식이 허락하질 않았기 때문이다.
동물들을 감옥에 가둬 놓고 강제로 수정시키고(강간하고!) 새끼를 낳으면 빼앗고 다시 또 수정시키고, 새끼가 먹어야 할 젖을 빼앗고 이렇게 몇 번을 반복한 후에−즉 성장 호르몬을 통해서 암컷의 재생산 능력을 최대한도로 착취한 후에− 마지막에는 도살장에 끌고 가 잔인하게 죽이는 일을 하면서 인간과 동물의 공생을 말한다는 게 과연 성립이 된다고 할 수 있을까. 현대식 가축제도는 이미 동물을 생명체로 보기를 포기한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은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그동안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남성중심주의와 가부장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던 이유가 바로 ‘자신에게 편리한 만큼’의 민주주의만을 주장하는 관점의 모순이 보였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사회적 평등을 외치는 열혈 투사들조차 자신의 애인, 아내, 그리고 여성들에 대해서는 별개의 논리를 취하고, 사회적인 영역에서는 진보의 이름으로 변혁을 위한 모든 노력을 다하면서도 사적인 영역에서는 생물학과 자연의 이름으로 남녀 간에 이중 잣대를 내미는 모습에 너무도 자주 분개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여성을 ‘최후의 식민지’로 표현하는 방식에조차 엄청난 인간중심주의가 자리 잡고 있음을 눈치챌 무렵, 나는 내가 도망갈 곳이 없음을 느꼈다.
처음으로 동물의 입장에서 특히 가축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았을 때, 내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이 어마어마한 학대와 학살을 딛고 선 것임을 알았다. 비유하자면, 내 부모와 조상들이 알고 보니 유태인 학살의 주범이었음을 새로 알고 난 후의 쇼크와 같았고, 어쩌면 현재 일본의 역사 왜곡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일본의 어린이가 일제식민지에 관한 적나라한 실상을 알게 되었을 때 느낄 법한 감정과 같을 수도 있으리라. 평범하고 선량한(?) 줄로만 알았던 시민은 다만 인간이라는 종의 기득권에 편승하여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학살에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입맛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비겁한 존재로 보이기 시작했다. 세뇌당했던 세월 속에서 그나마 직관적으로 느꼈던 불편함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기쁨은 있었지만 말이다.
초등학교 시절, 특별감사 기간에 학교 선생님들이 주도해서 특정 교과목을 배우지도 않는데 마치 배우는 것처럼 하라고 학생들에게 지침을 내려주었을 때 느꼈던 혼란은 일종의 분열 경험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유의 크고 작은 분열들은 살면서 계속 발생하였고 누구나 그렇듯이 냉소적인 마음을 가다듬으며 흘려보내는 것을 우리는 사회적응이라고 부른다. 거짓말이 옳지 않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느끼고 있는데 일부 선생님들이 그렇게 가르칠 때는 그나마 불만이라도 품을 수 있지만, 부엌과 밥상 위에서 일어나는 분열들은 의식 차원에서조차 어떻게 형용되기가 무척 힘들어진다. 고기맛에 길든 내가 당사자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닭고기를 꽤 좋아했지만 닭다리를 먹으며 뼈와 심줄을 볼 때마다 사람의 몸도 이렇게 생긴 것일까를 궁금해했다. 게도 맛있게 먹었지만 끓는 물에 살아 있는 게를 넣어서 게가 움직이는 걸 볼 때, 저 게는 지금 무엇을 느낄까, 정말로 고통스러울까를 궁금해했다. 생선 한 마리가 통째로 접시 위에 있을 때에는 생선의 벌어진 입에서 어떤 힘겨움이 느껴져서 그 생선의 눈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몸통 부분만을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면 제지를 받았다. 내가 하는 말은 예의에 어긋나며 내가 하는 생각은 부적절하다는 메시지를 계속 받아야만 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분열은 계속되었다. 내가 일하던 곳은 진보적인 단체였지만 고사를 지낼 때 진짜 돼지머리를 상 위에 올려놓았다. 처음으로 잘린 돼지머리를 가까이서 보았을 때 책과 그림에서만 보았던 프랑스대혁명의 단두대가 실감이 났다. 그리고 잘린 목 부분에 남아 있는 심줄과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여러 부위들을 보면서, 사람의 머리도 저렇게 생겼을까 궁금해했다. 그때 행사를 준비하던 동료가 정색하며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라고 딱 부러지게 말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내가 어떤 금기를 건드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보아도 본 척해서는 안 되는, 인간사회의 허용 범위를 넘는 선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여름방학 때 호숫가에 놀러 가서 낚시를 해 볼 기회가 생겼을 때에도 분열은 일어났다. 남들은 물고기를 여럿 잡을 동안 나는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을 때, 나도 어서 빨리 한 마리가 걸려들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미끼가 부족해지자 지렁이 하나를 반으로 잘라서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물고기가 걸려들었을 때의 기쁨이란. 그러나 내 기쁨은 잡힌 물고기와는 공유되지 않았다. 나는 낚싯바늘에 입이 찢어진 그 물고기가 무엇을 느낄까 궁금해했는데, 그건 바로 속았다는 배신감과 ‘당했다’는 느낌이었을 거라 생각했다. 물고기가 걸려들기를 바랐던 내 마음은 문득 사기꾼의 마음이 되어 버리는 듯하여 나의 즐거움은 온전해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레저 시스템과 정상적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문제의식을 진전시키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다. 마치 외국에 가서 새로운 문화를 배워야 했을 때, 나에게 판단할 권한은 없고 오로지 배워야 할 의무만 있었던 것과도 같이.
한번은 TV 다큐멘터리에서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동물을 밀렵하는 제3세계의 가난한 사람들과 싸움(?)을 벌이는 서구의 동물보호단체 사람들이, 일이 끝난 후에 저녁에 함께 바비큐를 먹는 모습을 보았을 때에도 나의 사고체계에는 분열이 반복되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특정 야생동물들을 살려내려는 그들의 애쓰는 마음에 동참했던 나로선 문득 동물로서 인정조차 받지 못한 바비큐로 탈바꿈한 가축의 입장에 대해 인식이 분열되는 것을 느꼈다. 정상적인 것으로 내 앞에 제시되는 상황들을 내가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건지 판단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나에게 숙제처럼 주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문화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 문화를 판단하는 일이다. 동물을 노예화하는 가축제도의 패러다임은 나의 일부이기도 했으니까. 흥미롭게도 분명히 기억하건대, 나는 언젠가 돼지라는 동물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털도 없고 온통 살만 쪄 있는 저런 돼지들은 뭐하러 태어난 걸까? 인간에게 잡아먹혀서 고기를 제공하는 것 외에는 정말 아무런 존재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깊이 있는 사유를 할 수 없는 생명체나 특정 목적을 지향하지 않는 존재들이 나에겐 아무런 가치가 없게 느껴졌지만, 이런 논리 때문에 과거에 다수의 여성들이 무시당하지 않았던가. 최소한의 교육도 받지 않고 집안일만 해야 했던 여성들, 그 와중에 끊임없이 임신하고 출산하는 일을 반복한 채로 자신 삶의 목적을 고민할 수조차 없었던 여성들을 보면서, 대부분의 남성 철학자들도 그런 유사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여성들은 합리성이 부족하고 감정적이며 본능에 충실하다는 유의 판단이 소위 ‘위대한’ (남성) 철학가들에게서 종종 발견된다. 돼지가 더럽다고 하지만 자연상태에서는 매우 깨끗한 동물이라고 한다. 어떤 인간인들 돼지우리에 살게 하면 그와 같지 않겠는가. 이것은 결과를 원인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오해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미지에 갇혀서 판단을 하기 때문이다. 소나 돼지들이 얼굴을 찌푸리며 괴로움을 호소하지 않기 때문이다. 움직일 수조차 없는 좁은 우리에 갇혀 있는 돼지가 좁아서 답답하다고 난리를 피우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좁은 그 공간에 그대로 있다. 고통은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표현되기에 그네들은 몸이 아프고 쉽게 병에 걸린다. 그런데도 무지한 눈으로 언뜻 보면 그네들이 가축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별 무리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수천 년간 여성들은 원래 종속적인 위치에서 ‘자연스럽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그러하듯이. 그러면서도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속담을 통해서 여성의 삶이 힘겨웠다는 사실을 다수가 인식하고는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가축이기 때문에 가축으로서 살아가는 거라고 믿게 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우리의 직관적인 앎이 잠잠해질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적극적인 이미지를 필요로 한다. 소와 돼지가 행복하다고 말하는 듯한, 웃는 얼굴을 하기를 바란다. 소고깃집에 있는 소들의 이미지는 얼마나 여유롭고 행복한가. 삼겹살집의 돼지 이미지는 귀엽고 신이 나 보인다. 치킨집의 닭은 만화 캐릭터처럼 쾌활하다. 프랑스의 어떤 치즈 상표는 “La vache qui rit(웃고 있는 암소)”이다. 행복한 소의 이미지만으로도 부족해서 아예 소가 웃는다고 소비자에게 직접 말해(세뇌해) 주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안심이 된다. 마음의 분열을 가라앉힐 수 있게 되고, 마음 한구석에서 자리 잡고 있던 의문과 불편함들은 보이지 않는 잠재의식의 창고로 떠밀려 내려간다.
사실 고기를 먹으면서 이 고기가 어떤 동물의 살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소의 살인지, 돼지의 살인지, 닭의 살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앎은 너무나 추상적이다. 이름도 없는 소이니 그 존재를 느낄 수 없을뿐더러 그 소는 우리에게 우호적이기까지 하다. 안심하고 자기를 먹어도 된다며 우리를 격려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가장 놀라운 것은 가축들이 고기가 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이 앎 역시도 어찌나 추상화되었는지, 죽음조차도 고기 생산과정의 하나의 모멘텀에 불과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 역시도 과거에 우리가 고기를 먹기 위해 가축들을 죽이는 것은 어쩔 수 없으니, 다만 고통 없이 빨리 죽게 되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다수의 육식자들이 은연중에 갖고 있는 생각이다. 나는 도살장 내부의 상황을 상상해 본 적도 없었지만 기계 작동에 의해 짧은 순간에 일이 처리되는 걸로 알고 있었다. 현대화된 자동처리 시스템을 상상하면서 도살의 장면을 쉽게 추상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추상적인 상상의 어리석음은 몇 개의 동영상과 몇 권의 책으로 여지없이 무너졌다. 가장 기가 막힌 것은, 동물들이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일렬로 서서 차례대로 죽음을 맞이할 거라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느냐는 점이다. 수많은 이미지와 상징을 통해서 가축들이 우리를 위해 스스로 고기가 되어주는 것에 마치 동의를 해 주기라도 한 것처럼 수천 번, 수만 번을 세뇌당했으니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이 당연하기는 하다. 우리가 접하는 모든 이미지 속에 강제나 폭력은 없었고, 행복하고 즐거운 가축들의 표정만 가득했다. 고기를 먹어서 즐거운 인간의 행복감을 그네들이 똑같이 공유하고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고기에 대한 광고는 고기 판매자가 아닌 고기의 당사자인 동물이 직접 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 자주 노출된 나(소비자)는 그 이미지의 영향으로 동물들이 충분히 동의한 상태에서 얌전히 안락사를 당했을 걸로 생각해버린 것이다. 세뇌를 당하면 이처럼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판단력도 흐려지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면 도살장은 피비린내나는 생지옥이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의 어려움은 지혜가 부족한 존재일수록 커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지혜가 부족할수록 맹목적인 두려움은 공포가 된다. 지혜의 부족으로 공포에 빠진 사람을 진정시키는 것이 어렵듯이, 오직 살겠다는 몸부림을 치는 동물들에게 무슨 수로 안락사를 시킨단 말인가. 제어기로 나아가지 않으려는 동물이나, 전기봉으로 치면서 그 동물을 기계를 향해 나아가게 하려는 작업자나 괴로운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는 사회가 외면하는 방식으로 대응해 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백정과 사형수를 참수하는 일을 했던 망나니들은 예로부터 천시되었고 심지어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반 사회와 격리되기도 한다. 적군의 목을 많이 베어 온 장수는 숭상을 받는 반면에 백정은 왜 경멸을 받아야만 했을까. 전쟁과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용기의 차원이지만, 제도의 심부름꾼으로서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처형하는 것은 용서받기 어려운 폭력이라는 사실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고깃덩어리를 얻어서 우아하게 식사를 할 수 있게 해 준 사람들에 대해 왜 사회는 그 수고로움에 고마움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일까. 게다가 우리의 건강(?)을 위해 죽음으로써 희생해 준 동물들에게 왜 우리는 최소한의 고마움이나 묵념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전쟁기념관에서는 전쟁의 참혹한 실상을 공개하는 것과는 달리 도살장의 실상은 철저하게 대중에게 은폐되어 있다. 죽어서 고기가 되어 준 동물, 그리고 우리 대신 그 동물을 죽여 준 도축업 노동자들에게 사회는 어떠한 고마움도 표현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고기를 먹을 때에도 아무 생각 없이 먹을 뿐이다. 육질이 질기네, 부드럽네 등의 말은 할지언정, 이 소가, 이 돼지가 나를 위해 희생되었다는 최소한의 인정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행여나 ‘고귀한 희생’이라는 언급을 했다가는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가축제도로 대표되는 동물 매매와 여성을 착취하는 성매매는 근본적으로 유사한 맥락에 놓여 있다. 살아 있는 존재를 재산, 자원, 도구로 간주하는 관점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가 가축제도라면, 노예제와 성매매는 그것의 인간 버전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개성과 인격이 있으나 포르노와 같은 성의 상품화는 익명성을 특징으로 하며 나아가 특정 신체부위를 선택적으로 소비할 수 있도록 하는 구조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정육점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특히 성을 구매하는 남성일수록 여성에 대한 존중감이 떨어진다는 사실과, 고기를 즐겨 먹는 사람일수록 가축에 대한 비하 심리를 갖는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사람에 대해서는 고마움을 느끼게 되는 법인데, 상품화된 성에 대한 욕망과 고기에 대한 욕망의 경우에는 그렇지가 못하다. 그 이유는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온전히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매춘여성에 대한 비하는 사실상 성을 구매하는 남성들이 스스로의 욕망에 대해 갖는 비하하는 마음을 상대방에게로 투사한 것에 불과하다. 성매매에서만큼이나 자기기만의 메커니즘이 순진하게 드러나는 사례는 없을 것이다. 성을 사는 다수의 남성들은 ‘보통의’ 선량한 일반 시민이지만 성을 파는 여성들은 낙인찍힌 불량한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유사하게도 고기를 구매하는 소비자들도 선량한 일반 시민인 반면에 고기를 생산하는 집단, 즉 도축을 통해 동물을 고기로 전환시켜 주는 백정들은 가장 천한 집단의 대접을 받아왔다.
이러한 이중규범에서 나타나는 사실은 성매매와 동물매매가 인간사회에서 실제로 순리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행위가 아니라는 점이다. 육식하는 인간사회는 육식을 지극히 정상적이고 순리에 따르는 행위라고 문화적으로 장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아무런 내적 균형과 안정성이 없다. 육식문화가 도살장의 내부를 공개하지 않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당당하게 문화의 영역으로 끌어올릴 수 없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우리는 현대의 육식문화가 스스로에게 부정직한 문화임을 알 수 있다.
스스로에게 정직하지 못한 집단의식은 육식의 진실이 ‘순리’가 아닌 ‘폭력’임을 스스로 알고 있다. 인간의 문화는 동물적인 약육강식의 흐름에서 벗어나는 것을 통해 윤리의 바탕을 마련하였고 이러한 윤리야말로 인간을 동물과 구별해 주는 기준이 되지만, 육식문화는 인간을 동물의 연속선상에 놓이게 함으로써 애써 올라간 차원을 다시 떨어뜨리는 중력 작용과도 같다. 예를 들어, 동물세계에서 ‘뺑소니’는 존재하지 않는다. 코끼리가 뛰어가다가 실수로 토끼를 밟아서 반쯤 죽였다고 해서 ‘그냥 갈까 아니면 토끼를 치료해 줄까’와 같은 딜레마는 성립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세상에서는 자동차로 사람을 치었으면 그것이 실수라 할지라도 그냥 가는 것은 ‘뺑소니’로 여겨진다. 그냥 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집단의식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기준이 되어 뺑소니라는 개념이 형성된 것이다. 무언가를 은폐한다는 것은 이미 그것이 나에게는 ‘빗나가는 행동’임을 뜻하듯이, 고기와 관련된 진실이 소비자 대다수에게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은폐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지금 이대로의 관행을 따르지 말고 변화할 필요가 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닐까.
축산업이 환경에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 육식으로 인한 수많은 질병들을 논외로 하더라도 채식을 선택하는 일은 나에게 가장 기초적인 의미에서의 정신적 온전성을 회복하는 일을 의미한다. 나는 고기를 먹기 위해 동물을 직접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는 사실, 그리고 그 동물이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내가 안다는 사실만으로도 육식은 나에게 선택 가능한 행위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고기를 안 먹으면서도 건강하게 잘 살 수 있다는 사실은 보너스로 주어지는 다행스러운 일일 뿐이다.
3. 불교는 나의 채식에 무엇인가
위와 같은 경험적인 맥락 속에서 나는 채식을 선택하게 되었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일은 많은 어려움과 부자연스러운(?) 긴장의 연속이었다. 습관과 문화를 거스르는 생활이 늘 그러하듯이, 채식주의자가 되는 일은 웬만한 사회운동에 동참하는 일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다. 가부장적인 습관에 젖은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그제야 실감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는데, 몸에 밴 습관 중에서도 먹는 습관은 존재의 근간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더 고난도의 실천이 아닐까 싶다. 처음의 몇 년간은 아이스크림류를 제외하고는 거의 일체의 동물성 식품을 섭취하지 않는 생활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불교가 나로 하여금 엄격한 채식 지향성을 풀어버리게 했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자로서 내가 만난 몇 분의 스승들이 나의 채식을 옹호해 주기는커녕 고기를 먹으라고 직간접적으로 권했기 때문이다.
내 여생에 다시는 고기를 먹지 않기로 비장하게 결심했던 나에게 스승의 말에 따르는 일은 하나의 도전이었다. 부모님의 권유나 주변 사람들의 유혹에도 끄덕하지 않았던 나였지만 깨달음의 스승의 경우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일체의 상에 걸리지 않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볼 때 스승의 지적은 나의 집착을 자각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실제로, 아주 오랜만에 고기 한 점을 먹었을 때의 느낌은 마치 범죄자가 되는 기분과도 같았으니까. 그런데 내가 걸림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자 기꺼이 내가 스스로에게 부여했던 ‘계율’을 깼지만, 고기 먹는 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 다수 수행자들과 스승이 못마땅하게 여겨지는 형식으로써 나의 ‘걸림’은 계속되었다.
수행자 집단에서 모두가 기존의 방식대로 육식을 할 때 ‘나 홀로’ 채식을 고집하는 것은 두 가지 면에서 불편하게 느껴졌다. 첫째로, 스승의 용인하에 모두가 육식을 하는데 내가 스승의 권위에 도전하고 ‘나만의 올바름’을 붙잡고 있는 격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둘째로, 그 결과 나는 채식하지 않는 그들을 간접적으로 비난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랬다. 이후로 오랫동안 나는 대체로 채식을 하다가도 수행자 모임 속에서는 함께 육식을 하는 융통성(?)을 발휘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경향이 다른 관계 속에서도 점점 확장되어 갔다. 그러다 보니 비록 개인적으로는 채식 위주의 식생활을 하고는 있지만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채식주의를 더 이상 지향하지 않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 성찰하게 되었던 생각들을 정리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올바름에서 용서로(죄의식에서 책임의식으로)
시간이 흐른 후에 알게 된 것은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이 곧 이념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유하자면 깨끗한 사람이 경우에 따라서 더러운 사람들과 함께 더럽게 놀아 준다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육식이 옳지 않다는 관점에서 다른 사람들의 육식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있는 한 그것은 채식주의라는 이념을 반쯤 투명하게 만든 것에 불과하며 나의 융통성도 은폐된 우월감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모든 이념과 올바름이 실체로서 기능할 때에는 필연적으로 비난과 죄의식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정말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념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려고 하기보다는 그 이념의 토대가 되었던 자신의 죄의식을 놓아버려야 한다.
나와 내가 속한 집단이 행한 잘못을 스스로 용서하지 못한다면 나의 죄의식은 외부로 투사되어 타인들을 비난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게 마련이다. 즉 육식의 억압성을 열렬히 고발하고자 하는 마음은 자기가 스스로에 대해서 느끼는 (과거의) 잘못을 외부로 투사함으로써 죄책감을 덜고자 하는 마음임을 알아야 한다. 누군가의 잘못을 고발하겠다는 마음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유사한 피해를 당했을 때엔 원망하고 용서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겉옷만 뒤집어져 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육식하는 사람들에 대해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는 한 그것은 내가 나의 과거에 육식했던 잘못을 아직도 비난하고 있다는 뜻이다. 과거의 자신의 어리석었던 모습을 용서하지 못하고 붙잡고 있는 한 그것은 올바름에 대한 실체화이고 과거에 대한 집착으로서 이념이 된다. 그리고 과거와 싸우고 있는 한 미래에 대한 창조는 가능하지 않다. 과거에 대한 죄의식에서 벗어나야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책임의식이 생기는 법이다.
2) ‘나는 피해받은 적이 없다’
자신의 과거 잘못을 용서한다는 것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용서할 수 있다는 뜻이다. 즉 가해자로서 죄의식이 사라질 수 있는 것은 입장을 바꾸어 피해자로서 생각했을 때에도 용서하는 마음을 낼 수 있을 때이다. 그런데 피해자가 용서를 한다는 것은 ‘피해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용서할 게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을 때에만 성립이 된다. 피해받은 적이 없다는 것은 일체가 내 업식의 작용이자 내 한마음의 나툼이라고 볼 때 가능한 관점이다.
피해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용서할 게 없는 사람은 비난할 게 없고, 비난할 게 없을 때에 비로소 순수하게 보살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난할 게 남아 있다면 그것은 보살행의 탈을 쓴 개인적인 화풀이가 될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운동이 실패하는 지점이 바로 이 대목이 아닐까 싶다. 명분이 그럴싸해도 깊이 들어가 보면 다른 사람들이나 특정 집단의 피해의식에 공감하는 작용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감은 언제나 에고의 공감이다. 에고는 편파적이기 때문에 에고의 공감도 언제나 편파적이다. 뉴스를 보며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지극히 편파적이듯이, 다른 존재들을 위해 흘리는 나의 눈물이 나의 에고를 확장하고 강화시켜 주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더 나아가, 실상은 피해받은 적이 없는 존재들을 피해자로 규정함으로써 거기에 묶이게 하는 작용을 하는 것은 아닌지도 보아야 한다. 즉, 공성을 관하는 반야바라밀에 기반하지 않은 공감작용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게임에 더 깊숙이 빠져드는 것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즉 (진리의 관점에서 보면) 나는 피해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마찬가지로) 너는 피해받은 적이 없으므로→나는 잘못을 행한 적이 없으며, 내가 잘못한 적이 없기 때문에→나의 과거를 용서할 수 있으므로→지금의 너를 용서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 속에서만이 다른 사람들의 잘못의 공성을 관할 수 있게 된다. 채식주의라는 이념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3) 용서할 수 없다면 참회를 하자
그러나 여전히 ‘내’가 있고 ‘나의 피해’가 실체로서 있다고 믿으며 살고 있다면 ‘타자’도 있고 ‘타자의 피해’도 실체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때에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죄악을 없애기 위한 참회가 필요하다. 즉 업이 공하다는 ‘제일의제’ 차원에서 자유를 깨달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세속제’ 차원에서 업을 지은 자가 업을 회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수행을 열심히 하고 정말로 정진하는 자에게는 육식이라는 살생 문제에 연연해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먹는 고기마다 카르마로 쌓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내가 먹은 고기들을 누가 천도시켜 줄 것인가. 내가 먹은 고기와 나는 분리될 수 없는데. 나 스스로 참회를 하는 수밖에 없으며, 참회하면서 계속 고기를 먹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일이 될 것이다. 즉 아무런 공덕이 없다는 뜻이다.
4) 섣부른 자기합리화에 속지 말아야 한다
언젠가 구내식당에서 내 앞에 놓인 생선 한 마리를 남겨 놓고 평소처럼 그대로 퇴식구에 넣으려고 하다가 문득 그 물고기가 그대로 쓰레기통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그의 죽음이 너무나 헛되게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와의 인연을 통해서라도 보다 좋은 환생을 얻기를 바라며 물고기를 먹은 적이 있었다. 의도하지 않게 우러나온 순수한 마음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마음이 자칫하면 관성적인 자기합리화가 될 위험은 얼마든지 있다.
도가 높은 부처님께 몸을 보시하게 된 동물이라면 그 인연은 소중한 것이라 할 수 있고, 그 죽음조차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고기를 쉽게 먹으면서 그 동물들을 건진다고 말하려면 각자 자신의 양심에 손을 얹고 솔직해지기만 해도 좋을 것이다. 너(동물)가 나(인간)에게 먹힌다는 것만으로도 너에게 이득이 된다거나, 내가 천도하는 마음으로 먹으니까 괜찮다는 생각이 들 때, 과연 그 동물이 뭐라고 대답하는지 마음으로 들어보면서 자기 생각의 진실성을 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식민자의 생각도 그와 유사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일제 식민지 덕분에 조선이 근대화되었다면서 일본이 도리어 은혜를 베풀었다는 관점을 표현하는 일본 우익 세력에서 느낄 수 있는 논리와 매우 유사하다.
입장을 바꾸어서 내가 부처님에게 기꺼이 나를 보시할 수 있을 때에만 그 생각은 진실한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차선책이 아닌 경우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진실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아야 한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살생(육식)을 하게 된 사람이 간절하게 상대를 천도하는 마음을 내는 것과, 순전히 입맛 때문에 끼니마다 고기를 먹는 사람이 그 고기를 천도시킨다는 논리에 기대어 자기합리화를 하는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 수행의 목적이 나를 버리는 데에 있음을 망각하다 보면, 나를 세우는 습(習)이 작동하여 자기도 모르게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자꾸만 논리화하는 경향이 생김을 알아차려야 한다.
5) 권위에 의존하는 편리함의 유혹
불교와 채식의 쉽고도 어려운 관계는 특히 권위에의 의존 문제와 관계가 있다. 부처님 당시에는 걸식하는 출가자들이 전적으로 채식했다고 할 수 없으며 경전에는 삼정육(三淨肉)과 같은 개념이 등장하기도 한다. 반면에 대승불교 경전들에서는 육식이 자비의 종자를 끊는 것으로 설명되면서 채식에 대해 매우 단호하고도 엄격한 관점이 드러나 있다.
불교신자라면 당연히 부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자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채식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대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각자의 몫이다. 삼정육에 대한 논의나 중도에 대한 언급을 통해 ‘적당히’ 먹어도 된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 이러한 결론을 내는 마음의 타율성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심지어는 자신의 스승이 혹은 큰스님께서 고기를 먹어도 된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에 근거해서, 혹은 스님들도 다 먹더라는 식의 논리에 근거해서 자신의 육식을 정당화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지는 데에 실패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스승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공성의 가르침인데,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 가르침을 무슨 면허증 정도로 실체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선과 악이 모두 공하다는 성찰은 악을 행해도 된다는 허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러한 경향은 낙태 문제에서도 유사하게 드러난다고 보인다. 죄업을 절대시하는(것처럼 보이는) 기독교에 비해, 공성을 기반으로 해서 ‘절대로 안 된다’의 담론이 약한 불교적 세계관에서는 상대적으로 낙태 반대의 목소리가 잘 나타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그 결과로 불교 인구에서 더 많은 낙태가 이루어지고 있다. 불교계 인구에서 불살생의 정신이 오히려 더 약화된 것은 가르침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자기 편한 대로 가르침을 이용한 결과이다.
예를 들어 어떤 큰스님께서 ‘낙태는 절대로 안 된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될 수 있으면 낙태를 하지 마라’고 했다고 치자. 이 말의 의미는 정말 어쩔 수 없이 낙태의 상황에 직면한 힘든 사람들에게 죄의식에 빠지기보다는 반야 줄을 붙들고 열심히 수행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다. 이 말을 듣고서 ‘아, 낙태를 금지하지 않았으니 기회만 되면 낙태를 해도 되는구나!’고 이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될 수 있으면 고기를 먹지 말고 채식을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불교적 상식에 대해서는 마치 수입 밀보다는 우리 밀을 먹는 것이 낫다는 수준에서 가볍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6) 살생의 카르마는 누구의 것인가?
‘나를 위해 죽이지 않은 고기’라는 개념은 가축을 직접 죽여서 먹는 사회적 배경 속에서 인과의 간접성을 전제로 타협을 한 차선책으로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현시대의 도축장에서 나온 고기는 소비자를 위해 죽인 고기이지, 어떤 특별한 귀족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제도화된 폭력에 편승하여 익명의 소비자로서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내가 먹으면 그것이 곧 나를 위해 죽인 고기가 된다는 사실은 부인될 수 없다. 또 그것은 사창가의 여자가 나를 위해 인신매매된 게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 여자를 사서 이용하는 데에 아무런 걸림이 없다는 논리와 다를 바가 없다. ‘알고 지은 죄는 알면서 받고, 모르고 지은 죄는 모르면서 받는다’라고 하는데, ‘모르는 척’하고 지은 죄는 어떤 식으로 받는 것일까. 적어도 받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도살장에서 직접 동물들을 비인도적으로 죽이는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고통은 만만치 않다. 그것을 단순히 그들의 카르마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소비자와 산업의 관계는 상호적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윤을 위해 육류산업이 소비자로 하여금 고기를 소비하도록 부추기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어떤 산업도 소비자가 줄어들면 사양길로 들어서게 마련이라는 점에서 소비자의 힘은 일차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어떤 경우에도 ‘도축업 종사자가 있기 때문에 고기 먹는 사람과 고기 파는 사람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도축업 종사자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로써 직접적인 살생의 카르마를 짓도록 내몰린 약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동물 살생의 카르마가 도축업 종사자만의 카르마이기를 믿기로 선택하거나, 아니면 그 모든 과정이 바로 나의 카르마임을 인정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참고로, ‘나를 위해 죽이지 않은 고기’라는 생각을 유지하려면 ‘축산업자가 자신의 이윤을 위해 죽인 고기’라는 생각에 의지하거나, ‘도살업자가 자신의 생계 혹은 폭력성(?)을 해소하기 위해 죽인 고기’라는 생각을 만들어 내야 할 것이다.
7) 동기의 순수함
정말로 진지한 수행자 중에는 대체로 채식을 했던 시절을 경험해 보지 않은 경우는 드물다고 보인다. 그러나 추상화된 앎에서 이루어지는 육식만큼이나, 추상화된 앎에 기반한 채식은 여전히 이기적인 실천이 될 수 있다. 나의 수행을 위해, 나의 선업을 위해, 나의 맑은 기운을 위해서만 행하는 채식에는 한계가 있다. 그것은 두려움에 기반한 자기보호의 마음이기에 취약하다. 아울러 거기에는 계산된 선심과 둘로 보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공덕이 없다. 고아원의 아이들에게 많은 선물을 주는 것은 그 아이들이 바로 내 아이들임을 한 번 인정하는 것만 못하다. 이기적인 목적에서 하는 채식은 쉽게 지치고 쉽게 포기되지만, 동물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마음에서 하는 채식은 포기되는 경우가 드물다고 본다. 가는 식당마다 도무지 먹을 수 있는 게 없어서 지치는 마음이라 해도, 가축으로 태어나서 죽는 것을 되풀이하는 것이 더 지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마음보다 사랑하는 마음은 언제나 더 여유롭고 강하다.
8) 사랑에는 기준과 경계가 없다
정치적 올바름의 개념만큼이나, 수행적 올바름의 개념을 설정하는 것은 교조주의로 빠지게 한다. 동물들을 존중하는 일에서 채식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는지도 모른다. 가죽제품, 동물실험을 거치는 화장품과 의약품의 이용, 토지 개발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 등과 같은 종합적인 현실 앞에서 채식은 작은 실천에 불과하다. 이만하면 됐다고 할 수 있는 실천의 기준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는 일체가 나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나의 경험 대상 전체가 나와 불이(不二)의 관계일진대, 사랑의 대상은 범위를 설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경직되고 닫힌 마음으로 채식하는 사람보다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육식하는 사람이 낫다고 볼 수도 있으리라. 다만 자비의 흐름은 종의 경계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4. 채식주의를 넘어선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러나 위와 같은 많은 성찰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남아 있는 고민이 있다. 이념으로서 채식주의라는 사회운동이 여타의 다른 사회운동처럼 이분법적인 도덕관념을 생산하게 하는 것은 지양해야겠지만, 개인 수행 차원의 ‘걸림 없는’ 채식과 사회적 실천 차원의 철저한 채식이 미치는 영향에는 차이가 있다고 보인다.
예컨대, 자비로운 마음으로 채식하며 주변의 육식하는 사람들과 걸림 없이 조화롭게 지내는 스님들 100명이 생활하는 곳에서보다는, 철저한 채식을 하며 사회적 실천 차원에서 채식주의를 전파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싸움도 마다하지 않는 한 사람의 채식주의자가 있는 곳에서 결과적으로 더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동국대가 아닌 서울대에서 먼저 채식식당이 생겨났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채식식당이 생김으로 인해 날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채식을 경험하게 되는 것의 긍정적인 효과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필자에게 불교적 수행은 그동안 가져왔던 모든 이즘(~ism)들을 무력화시키는 효과를 가져다준 측면이 없지 않다. 부정적인 고정관념 외에도 긍정적인 고정관념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은 중요한 발전이었다. 특정 정당에 대한 반감이 사라지고 심지어는 가부장적인 제도와 소위 ‘꼴통 보수주의자들’에 대한 적개심도 거의 다 사라졌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정치적인 무관심이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무감각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마치 무아(無我)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무기공(無記空)에 빠지는 것만큼이나 또 다른 오류가 될 것이다.
채식주의라는 이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다시 적당히 육식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분법적이고 대립적인 마음 없이 채식을 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필자가 투쟁의 대상으로 삼았었던 가부장제와 더 이상 ‘싸우지’ 않는 것은 그것이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 마음의 한 부분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싫어하고 밀어냈던 그 모든 위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시스템들은 이미 내 안에 존재하지만 내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부인했던 것들이다. 즉 내가 싫어하는 세상은 내가 싫어하는 나의 잠재의식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것과 다시 통합적으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나의 권위주의와 위계주의를 용서해야만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육식문화의 폭력성과 기만성을 ‘폭로’하고 ‘고발’하는 수준의 채식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그 모든 특성이 있음을 성찰하고 스스로를 용서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진실을 직면하고 용서하는 과정이 생략된다면 그것은 겉으로는 진일보하게 된 것 같아도 단지 힘으로 상대를 제압한 사람의 불안한 승리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서 결국은, 내가 이 세상의 모든 살생과 폭력을 ‘나’의 잘못으로 보며 철저하게 참회를 했을 때라야 비로소 나의 채식은 채식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은 나의 지난 잘못들을 방영해 주는 TV 거울과도 같기에, 내 눈에 보이는 문제들은 나의 자각과 참회를 기다리는 사생아와도 같다. 나의 자식임을 인정받을 때까지 수많은 세월을 윤회하면서 사생아들은 계속 등장한다. 사생아를 고아원에 맡기고 고아원 원장의 비리를 고발할 것이 아니라, 그 아이가 나의 친자식임을 인정하는 일이 급선무라는 뜻이다. 내 친자식으로 키우면서 때로는 불가피하게 야단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이미 내가 나에게 하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내 자식임을 아는 사람에게는 ‘이 아이를 굶겨도 된다’, 아니다 ‘하루에 한두 끼는 먹여야 한다’와 같은 유의 윤리적 고민이 발생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고기를 어느 정도까지는 먹어도 된다’, 아니다 ‘나를 위해 죽이지 않은 고기만 먹어도 된다’와 같은 유의 고민은 발생하지 않는다. 또 육식하는 사람에게 ‘채식을 전파해야 한다’, 아니다 ‘단순히 나만 채식하면 된다’와 같은 유의 고민은 육식문화와 그 문화 속에 살아가는 이들을 나의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는 고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습관적으로 ‘채식주의’의 긍정적인 효과에 대해 고민이 남아 있다는 것은 내가 아직 이 세상이 내 업식의 반영임을 인정하는 데에 부족함이 많다는 뜻인 것 같다. 대부분의 윤리적 고민이 그러하듯이 그것은 대상을 둘로 보는 관점에서 나타나는 딜레마이기 때문이다. 또한 수행과 사회적 실천을 둘로 보는 관점에서 제기되는 갈등일 수도 있다. 사회적 실천을 어떤 마음 상태에서 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중생의 투쟁이 될 수도 있고 보살행이 될 수도 있으니, 섣불리 공동의 지침이나 합의를 이끌어내려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지금 현재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너의 잘못을 비판하는 채식주의’에서 ‘나의 잘못을 참회하고 용서하는 채식’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수행은 사적인 영역으로 놔둘지라도 최소한 불교계 행사나 모임에서만큼은 식사를 채식으로 통일했으면 하는 바람이 지나친 욕심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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