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보에 귀의하며,
1. 대승불교와 초기불교에서 규정하는 ‘마음心’에 대해
거칠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心.意.識은 각자 다른 요소이자 역할입니다.
심의식의 동일화 혹은 실체화로 심각한 혼란과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마음은 오온五蘊에서 감수受와 인지想를 조건으로 형성된 심리로 인식識과 행위行의 토대로 이해하면 됩니다. 어려울 게 없어요.
삶은 안의 五蘊이 밖의 五蘊을 대상으로 보고 듣고 생각하고(인식) 심리를 형성해서(마음의 재구성) 의도적인 생각과 언어, 몸짓으로 행위하는(행위) 것이죠.
단순하죠. 마음을 토대로 조건으로 인식하고 행위하는 것, 이게 바로 우리네 삶입니다. 사족이지만, 인식은 과果로서, '보고 듣고'가 아닌 '보이고 들어지고'입니다. 언어와 사유의 습관으로 '보고 듣고 생각하고'라 할 뿐입니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은 인식과 '마음의 재구성'을 거친 행위의 영역입니다.
인식하고 행위하는 영원불변의 주체로서의 신비하고 추상적인 초월적 실체로 마음을 자리매김할 근거는 없습니다.
인식은 識이 하는 것이며, 행위는 行이 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컨트럴타워control tower라고 할까요. 이는 곧, 인식과 행위의 상호작용feedback으로 마음이 형성되지만, 마음과 인식. 행위는 동시에 서로를 감싸안고서 나아가는 운명공동체라고 이해하면 될 듯싶습니다.
2. 연기와 오온五蘊과 오취온五取蘊
12연기는 하나이면서 두 개인 중첩적인 바퀴가 구르고 있습니다. 五蘊과 五取蘊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둘은 동시에 회전하지만, 五取蘊의 회전이 멈추고서 五蘊의 회전이 멈춘다는 차이가 있지요. 범부중생과 유학(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에게는 여전히 五取蘊이며 五蘊이 드러나지 않은 채 둘 다 회전합니다. 아라한이 되어서야 비로소 五取蘊의 회전이 멈추고 즉 오온의 새로운 형성과정이 소멸합니다(유여열반). 그리고 과거 업의 누적된 과보인 五蘊만이 회전하다가 금생의 수명이 다하면 마침내 五蘊의 회전마저 멈추게 됩니다(무여열반).
아라한에게는 수명을 다하기 전까지 ‘無明’ 대신 ‘明’이 갈음하고 ‘갈애와 취착’이 제거된 채 회전합니다. 즉 “명-행-식-명색-6입-촉-수-유-생-노사.수비우고뇌”로, 五取蘊이 소멸된 五蘊만의 회전입니다.
연기에 대한 여러 해석 가운데 삼세양중인과는 무시해도 됩니다. 12연기든 10지연기, 8지연기든 모든 연기는 ‘지금.여기’에서의 五蘊과 五取蘊의 작용과 회전입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신 화살의 비유에서, 첫번째 화살은 오온에 수반되는 고통이며, 두번째 화살은 오취온에 수반되는 고통입니다. 첫번째 화살은 피할 수 없지만, 두번째 화살은 맞지 말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깊게 성찰해야 합니다.
3. 사성제에서 苦가 전면에 내세워진 의도는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세상이 삶이 고통이 아니라면 불만족스럽지 않다면, 불교가 설 자리는 없죠. 삶을 바르게 꿰뚫어 보고 그 참모습이 ‘無常, 苦, 無我’임을 확인하라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니 말입니다. 세상을 싫어하여 떠나고 버리고 집착없이 해탈해야 한다는 수행의 당위성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하죠. 무상하고 무아이지만 그 결과는 늘 樂, 만족과 즐거움이라면 무엇이 문제겠어요. 윤회가 있든 없든, 내가 있든 없든 그저 즐기면 되는 것을.
苦는 4고8고로 설명되며 그 중 生老病死인 오온의 苦는 범부중생으로서는 당장 어쩔 도리가 없으니 일단 젖혀놓고,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불득고의 집합체인 五取蘊苦에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안팎의 五蘊을 ‘내 것이다, 나다’로 집착하는 욕망과 착각. 이것이 ‘내 것이며, 이것이 영원한 나’라는 소유의 욕망과 존재의 욕망은 결코 채워질 수 없기에 ‘고통과 불만족’을 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는 연기에서 五取蘊의 생멸을 멈추지 못하고 반복하며 苦를 끝없이 잇게 하는 조건이 됩니다.
'無我'를 체득해서 오취온을 깨뜨리면 자연스레 오온도 생멸을 멈추는 것이라 이해하고 확신합니다.
4. 교학에 지나치게 몰입해서는 안 됩니다.
기본적이자 핵심적인 교리 요컨대 ‘사성제, 연기’만 이해하기에도 사실 벅찹니다.
화엄경 금강경 법화경 등 대승경전에 선어록, 아비담마 주석서들, 니까야와 아함 경전들...2500여년에 걸친 불교교학의 숲은 참으로 넓고 깊지요. 거기에 다양한 학자와 선지식들의 해설들. 학문적 깊이와 수행의 경지가 제각기 달라서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지 범부중생으로서는 가늠키가 어렵습니다. 자칫 길을 잃기 쉽고 무기력해지기 십상입니다.
재가자로서 일상생활을 영위해야 한다는 한계, 물리적인 수명과 지성의 한계를 감안하자면, 대체로 이견이 없는 교학인 사성제와 연기, 삼법인을 내내 곱씹어보며 성찰하고, 니까야나 아함경을 간간이 들춰보는 것으로도 공부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불교는 이론과 지식이 아닌 수행의 차원입니다. 교학은 산행 지도에 지나지 않아요. 교학에 몰입함은 전문학자들에게 맡기고, 수행자로서의 자세를 갖추는 것이 좀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3학, 8정도, 4념처, 37조도품...
어느 길에서 걸음을 떼어도 삼매와 지혜에 힘입어서 해탈, 열반이라는 궁극적 목표에는 도달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
더듬어보니 불교와 인연이 닿은 지 25여년 되었습니다.
대부분 재가자들이 그렇듯, 선종과 대승의 다양한 경전과 어록들에서 시작해서,
유식과 중관, 아비담마, 니까야...이렇게 물꼬가 트이고 흐름이 진행되었습니다.
주변 상황이 여의치 않은, 먹고살기 바쁜 재가자로서 교학공부와 수행을 챙겨나가기가 버거웠지만,
불법에의 확신과 수행과정에서의 여러 체험에 힘입어 스스로에게 격려를 건네며 버틴 듯도 싶습니다.
건강이 허락치 않아 블로그에 어쩌다 글 올리는 일도 더 이상은 힘들 듯합니다.
내내 정진하시고 깨달음을 성취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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