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如如한 날들의 閑談

조사선, 간화선의 한계

slowdream 2023. 1. 24. 15:57

조사선, 간화선의 한계

 

중국선이 태동한 역사적 배경을 고려해 볼 때, 도가와 유교의 뿌리가 깊고 그 세력이 여전한 중국의 현실에서, 외래 종교인 불교가 명맥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이 왜곡된 인지의 전면적인 전환을 요구하기에 일반 대중에게 다가가기는 어렵습니다. 문맹이 거의 사라지고 정보공유가 활발한 요즘에도 그러할 진대, 문자와 사유에 익숙한 이들이 드문 1500여년 전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입니다. 지식인 위주의 유교에 비해 도가는 민중적 요소가 강하고 불교의 가르침과 닮은 구석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외래종교인 불교가 유교와는 대립하고 노장자 철학사상과는 손을 잡고 뿌리를 내리고자 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타당합니다. 선불교의 조사 가운데 나환자도 있고 일자무식도 있는 것으로 보건대, 선불교의 기본 태도에는 민중지향적인 요소가 아주 강하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선종에서도 특히 조사선은 최상승선이라 자칭하며,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의 한 마음, 마음자리를 깨닫는 것을 한소식했다고 합니다. 일심 一心, 한마음, 공적영지 空寂靈知, 후대로 가면서 불성, 자성, 중생심, 평정심 등으로 규정하게 됩니다. 초기불교에서의 마음의 규정과는 사뭇 다르게 매우 추상적이고 신비적인 대상화입니다. 또한 이러한 경지를 실체화하면서, 붓다께서 무척 경계한 상견 常見, 영원주의에 기울어질 우려 또한 커지게 됩니다.

 

임제의 할 喝 덕산의 방棒처럼 방망이나 주장자로 두둘겨패거나 소리를 꽥 지르거나 하는 맥락이 제거된 행위(조사선)나, 뜬금없어 보이는 공안(간화선)들이 선사들이 주로 드러내는 수행방편입니다. 이러한 화두와 행위들의 견처, 낙처는 두말할 것도 없이 깨달음의 요체인 연기, 삼법인입니다. 또한 법들이 드러나는 작용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선사들의 이러한 방편에 맞서 법을 청한 수행자들 또한 제각기 나름의 수준에서 기틀을 드러냅니다. 저의 경우라면 이런 식일 겁니다. ‘일면불월면불’에는 ‘허공에 달 그림자가 스쳐갑니다’로, 바닥에 원을 그리고 ‘들어가도 맞고 안 들어가도 맞는다 入也打不入也打’에는 손뼉을 짝 치고서 ‘다만 속지 않을 따름입니다’로, ‘병 속의 새’에는 ‘이미 날아갔습니다’로 맞받아칠 것입니다. ‘부모미생전본래면목’에는 손뼉을 짝 치고서 큰절을 올릴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선의 내용과 형식이 왜곡과 변질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착각도인들이 양산되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붓다의 근본 가르침과 어긋나는 그릇된 이치에 현혹되어 착각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둘이 아님 不二’가 그러하며, ‘본래 부처 本覺’이 그러합니다. ‘이대로 완전하다’는 각성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선의 속성상 당연한 귀결일 수 있습니다. 언어문자의 한계를 극복하고, 무지한 중생들을 제도하겠다는 민중지향적 태도는 형이상학적이고 신비적인 태도로 점차 바뀌어 버립니다.

 

붓다께서는 깨달음의 요체를 정확하고 소상하게 밝히셨습니다. ‘스승의 빈주먹’이 좋은 비유겠지요. 꽉 쥔 주먹 안에 전하지 않은 비밀스런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하지만, 북방 밀교나 선교는 ‘스승의 주먹’안에 비밀스런 교의가 있을 것이라는 암시와 이를 깨친 제자에게만 법을 전하는 사자전승의 전통을 새로이 만들었습니다. 진리를 드러낼 수 없다면 붓다의 팔만사천 법문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얘기인지요.

 

언어도단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言語道斷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

선의 종지는 그러할진대, 그 가르침에는 노자, 장자의 그늘이 아주 짙게 배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노자의 ‘무위자연’ 장자의 ‘제물론 齊物論 , 물아일체 物我一體, 소요유 逍遙遊, 좌망 坐忘 , 심재 心齋’등의 언설은 선에서 주창하는 무차별, 불이, 대자유인, 하심 下心, 평상심 등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노장자의 철학사상에 불교가 흡수된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힌두교에 사실상 접수된 것처럼 말이죠. 

 

정보통신과학혁명의 혜택으로 인해 이제는 집에서도 중국과 한국의 고승들, 선승들의 법문을 대할 수 있게 됐습니다. 아쉽게도 붓다의 근본 가르침은 찾기 어렵고, 열반경 법화경 반야경 등의 대승경전과 중관학과 유식학 관련 저서들, 외도인 영적 수행자들의 행적, 기복과 신통력 등이 가득합니다. 초기경전인 니까야나 아함경을 설하는 수행자들은 참으로 드뭅니다.

붓다께서 자신의 깨달음을 고스란히 드러내신 까닭은, 자신이 걸어오신 길이 숱한 시행착오와 고통으로 점철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이 헛된 품을 팔지 않고 곧바로 깨달음의 길에 접어들게끔 자비를 베푸신 것이죠. 뭇중생들이 자신처럼 기약 없고 고달픈 깨달음의 여정을 밟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이죠. 그런 까닭에 우리는 어떤 정보도 주어지지 않은 채 무작정 길을 떠나는 수행자와는 달리, 목적지에 이르는 길과 방법,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의 보상인 깨달음이 무엇인지 모든 정보가 담긴 수행지도를 손에 쥐고서 길을 떠나는 행복한 수행자인 것입니다. 문제는 붓다께서 전하신 수행지도와는 전혀 딴판인 왜곡된 정보의 수행지도가 난무한다는 현실입니다.

 

‘깨달음’은 인식론적 전환으로 예류도에 속합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심화와 체화, 번뇌의 점차적 소멸이 존재론적 전환으로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 무학자의 길입니다. 무학자, 아라한이 되었을 때 비로소 범부에서 성자로 완벽한 인격적 탈바꿈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선불교에서 얘기하는 궁극적 지향인 깨달음은 성자의 첫 번째 관문인 예류도에 속한다 해도 무리가 아닙니다. 물론 선가에서 깨달음 이후에 꾸려야 할 살림살이[補任]로 ‘청정 淸淨과 수연 隨緣’을 꼽고서 깨달음 이후의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지만, 한국 불교의 현실에서는 확인하기 어려운 지경입니다.

 

깨달음은 ‘여실지견’에 비견할 만합니다. 여실지견에 이르기까지는 사념처 수행으로 그리고 그 후 과정은 좀더 철저한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으로써 깨달음을 심화시키고 체화해서 마침내 번뇌를 소멸하여 해탈하는 것입니다. 범부들도 꺼려하는 막행막식을 자칭 깨달은 법복 걸친 도인들이 거침없이 거리를 횡행하는 모습에 서글픔이 앞서는 까닭은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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