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如如한 날들의 閑談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 / 프로이트와 라캉

slowdream 2025. 1. 17. 20:13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 / 프로이트와 라캉


서양철학사에서 중세의 신학시대를 마감하고 합리적 이성의 근대를 열어젖힌 사람을 데카르트로 이해하자면, 근대와 현대의 경계에 선 사람을 니체로 설정해도 무리는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현대철학의 차별점은 어디에 두어야 할까요? 바로 구조주의입니다. 프로이트, 마르크스, 소쉬르, 레비 스트로스, 하이데거 등등. 그렇다면 라캉, 들뢰즈, 데리다 등 구조주의를 계승한 탈구조주의, 후기구조주의는 구조주의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존재론과 인식론을 좀더 세련되고 성숙하게 다듬었다는 점입니다. 또한 이들 모두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불교의 철학과 사유에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니체, 하이데거, 라캉, 들뢰즈 등의 주요 철학자들이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불교에 영향을 받았음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의 대표 주자인 프로이트와 라캉을 예로 들어서 그 차이점을 밝혀 보겠습니다.

프로이트의 욕망이론은 수직적인 위계질서를 갖고 있습니다. 의식, 전의식, 무의식이 바로 그것으로 무의식을 본질, 토대로 삼고 있습니다. 유아론이자 실체론입니다. 라캉의 욕망이론은 수평적 평등질서로,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가 현상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현상계를 초월한 세계는 없습니다. 무아론이며 무실체론, 연기론(상호의존적 관계)입니다. 라캉의 3계는 라캉이 참고했는지 여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불교 유식학의 3性에 해당합니다.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이 바로 그것입니다. 변계소집성은 상상계, 의타기성은 상징계, 원성실설은 실재계에 배치됩니다.

물론, 실재계를 현상계의 한 구성요소, 상상계. 상징계와 동등한 위치를 부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는 그릇된 이해입니다. 신좌파인 슬라예보 지젝은 상징계와 상상계 사이에 실재계를 위치시킵니다. 하지만, 실재계는 상상계와 상징계의 내적 속성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구멍, 틈, 균열’으로 규정할 수 있는 실재계가 상상계와 상징계와 만나면서 그들에게 상흔을 남기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미 상상계와 상징계가 실재계를 그 속성으로 하고 있기에 구멍, 틈, 균열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
따름입니다. 물론 라캉은 실재계가 어디에 위치하는지 명시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인식이 실재계를 확인하지 못했을 때, 상상계와 상징계는 허구적 세계인 매트릭스 matrix로 형성됩니다. 실재계를 확인했을 때 비로소 상상계와 상징계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존재의 태생적 한계인 불완전성, 불확실성 곧 ‘구멍, 틈, 균열’에서 우리는 불가피하게 욕망을 타자에게 투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재계는 존재의 속성을 규정하는 불교의 3법인(無常, 苦, 無我)에 다르지 않습니다.

구조주의는 구조와 그 의미가 단일하게 고정되어 있으며 바깥 세계(타자)와 대립합니다. 허나 탈구조주의는 구조와 그 의미가 변화하며 복잡하고, 타자가 내재적이며 외재적입니다. 외재적 대립관계가 아니라 내재적이며 상호의존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주체는 이미 타자를 머금은 무아로서의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라캉의 “주체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선언이 대표적입니다. 주체의 영역에 이미 타자가 침습해 있다는, 그런 까닭에 주체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수밖에 없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결론적으로, 현대철학은 근대의 합리적 이성을 좀더 세련되고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더 나아가 무아론의 정립으로 발전합니다. 우리 인식이, 이성이 세계와 나를 좀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이는 불교와 전적으로 맞닿습니다. 그들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2,600년 전 붓다의 가르침을 마주하게 되었던 것이죠. 현대철학뿐 아니라, 현대물리학, 뇌과학, 심리학, 생물학 등 모든 과학분야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진리는 은폐되지 않지만, 다만 어리석음으로 인해 알아채지 못할 따름인 것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