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와 똥막대기(도덕경 해설)

도덕경 1장. 이름할 수 없는 도

slowdream 2007. 8. 10. 17:09
 

<제 1장. 이름할 수 없는 道>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말할 수 있는 道는 불변의 道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불변의 이름이 아니다. 이름 없음은 천지의 비롯함이며, 이름 있음은 만물의 어머니이다. 그런 까닭에 욕심이 없으면 그 신묘함을 보고, 욕심이 있으면 그 경계를 본다. 無名과 有名은 한곳에서 나왔으나 이름만 달리할 뿐, 뭉뚱그려 말하자면 오로지 신비할 따름이며, 모든 신묘함의 문이다.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

 

  한마디로 道란 뭐라 말할 수 없는 대상이지만 불가피하게 이름을 붙이자니 道라는 것으로, 道란 불가지론(不可知論)의 영역이라는 뜻이다. 이는 유가(儒家)나 인간중심의 실천철학에서 강조하는 인륜도덕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주역(周易)>의 태극(太極)과 불교의 중도(中道)에 가깝다. 노자(老子)는 작위적이고 인위적인 어떤 행위도 삶의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함을 강조한다. 禪佛敎(선불교)의 “心行處滅 言語道斷(마음이 작용하는 자리가 멸하고 언어의 길이 끊기다)”과도 맥락이 닿는 부분이라 하겠다. 부처가 그랬듯, 노자 또한 말할 수 없는 대상을 말로써 표현해야만 하는 난처한 상황을 절감할 따름이다. 생각과 논의로는 접근이 불가능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세계, 즉 의미가 무화되고 소멸되는 자리에서 의미를 부여한들 왜곡되고 굴절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언어와 문자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 玄之又玄은 이러한 처지를 가리킨다. 玄은 먼 하늘처럼 아득함,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림, 깊고 깊음 등이 그 사전적인 의미지만 좀더 정확히는 딱히 뭐라 의미할 수 없는 경계를 가리킨다.

 

  1장은 <도덕경> 전체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핵심을 담고 있다. <도덕경>의 첫 단추를 꿰는 걸음은 바로‘무(無)’이다. 無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도덕경>에 대한 이해는 하늘과 땅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멀어진다. 단언하건대, 無는 道가 아니다. 無와 有는 상대적인 현상계의 두 양태이며, 道는 현상계를 조직하는 궁극적 원리이자 이법(理法)이다. 요즘 말로 하면, 질서ㆍ구조ㆍ법칙 등이겠다. 無를 道로 이해하는 경향은 3세기 무렵 중국 위나라 왕필(王弼)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아직까지도 <도덕경> 해석의 일인자로 손꼽히는 왕필에게 道는 無이며 無는 허정(虛靜)이다. “도는 무를 가리킨다. 통하지 않음이 없고, 연유하지 않음이 없다(道者 無之稱也 無不通也 無不由也).”“천하만물은 모두 유에서 생한다. 유가 비롯한 곳은 무를 그 근본으로 한다(天下之物 皆以有爲生 有之所始 以無爲本).”

 

  노장(老莊)과 儒家, 佛家의 사상을 취사선택하여 성리학의 체계를 구축한 주돈이(周敦頤)와 주자(朱子)는 우주의 근본원리인 太極이 無極이며, 理가 無임을 선언한다. 이들의 無는 불교의 공(空)을 의식한 흔적이 역력하지만, 空을 잘못 이해한 데서 결국 오류를 범한다. 空은 無가 아니며, 佛家의 中道와 연기(緣起)의 다른 이름이다. 노자의 道는 無와 有를 동시에 감싸안는다는 점에서, 佛家의 中道와 일정 정도 맥락이 닿는다고 봐야 하겠다. 노자와 부처가 시공을 뛰어넘어 함께하는 자리가 바로 여기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道는 이법이며, 無와 有는 손등과 손바닥처럼 현상계의 두 양태임을 명심하자. 하나 덧붙이자면, <도덕경> 곳곳에서 노자는 有에 비해서 無를 좀더 우월한 위치에 놓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이는 有에 길들여진 편향된 눈길을 바로잡기 위해서이지 다른 뜻은 없다. 無와 有는 상호의존적인 관계로서 전적으로 동등하다.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無名=天地之始으로 해석해도 좋고, 無=天地之始로 해석해도 좋다. 名은 존재이므로 결국 無名이 無인 것이다.  無名은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有의 세계, 즉 현상계를 이루는 有와 無라는 존재의 두 양태 가운데 無의 세계를 가리킨다. 無는 ‘없음’이 아니라 ‘비어 있음’ 즉 부재(不在)이며 不在한다는 것은 곧 이름이 없다는 것, 또는 잊혀진 이름에 다름 아니다. 현상계의 모든 존재에 이름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오감과 인식에 포착된 대상에 한해서 이름이 주어질 따름이다. 비유하자면, 넓은 바다[無]에 점점이 솟아 있는 섬[有], 나무[有]와 숲[無]이랄 수 있겠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은 그를 둘러싼 어둠이 있어서 빛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有名]는 미미하지만, 그저 그렇게 살다가 스러진 이[無名]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그런 즉 無는 ‘무한한 有’에 다름 아니다. 천지는 현상계의 무한한 존재로 일반성을, 만물은 유한한 존재로 개별성을 의미한다. 始와 母는 無와 有라는 이름이 주어짐으로써 천지와 만물이 인간의 의식에 솟아올랐음을 뜻한다. 有는 차별[개별]의  상대적 세계이며, 無는 무차별[보편]의 상대적 세계이다. 낮에는 모든 사물이 고스란히 제 모습을 드러내지만, 밤이 되면 개별적인 윤곽이 사라지듯.

 

  <주역 계사전(周易 繫辭傳)>에 나오는 말씀을 빌려와 노자의 道와 <주역>의 太極을 거칠게나마 비교해 보자. “一陰一陽之謂道(음양이 갈마드는 것을 도라 일컫는다)” “生生之謂易(펼쳐지고 펼쳐지는 것을 역이라 이른다)”, “易有太極 是生兩儀(역은 태극이며 태극은 음양으로 펼쳐진다).” 즉 易은 道이며, 太極은 물질세계를 지배하는 선험적 차원의 질서이며, 陰陽은 그 질서가 현상세계에서 표현되는 경험적 차원의 두 양태이다. 밤과 낮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밤은 낮의, 낮은 밤의 또다른 표현일 따름인 것이다. 동전의 양면, 야누스(Janus)의 두 얼굴처럼. 易은 변화이며, 운동이다. 그리고 生은 ‘낳는다’가 아니라 ‘펼쳐진다, 표현된다’로 종종 이해하는 것이 <도덕경>뿐만 아니라 <주역>의 세계, 더 나아가 성리학 등 동양철학의 근본개념을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고상무욕이관기묘 상유욕이관기요) 欲은 작위적인 지향성으로 함[爲]이 바로 그것이다. 무욕은 곧 무위(無爲)이며, 유욕은 유위(有爲)이다. 그런 까닭에, 무위로써 바라보면 현상계의 진정하고 오묘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유위로써 바라보면 유한한 존재들의 경계, 차별의 세계를 확인한다는 것이다. 노자에게는 無와 有의 존재론적 개념보다는 무위와 유위의 실천적 개념이 좀더 큰 의미를 갖는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此兩者同

 

  마치 화엄의 사사무애(事事無碍-현상계의 존재들이 막힘없이 소통함) 법계를 떠올리게 한다. 이는 곧 緣起, 中道를 가리키는 것으로 無와 有는 상보적(相補的)이다. 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此有故彼有 此無故彼無 此生故彼生 此滅故彼滅).” 어느 철학자가 선언한 ‘無는 존재의 안감이다’를 살짝 비틀자면, ‘道는 존재의 안감이다’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현상을 넘어선 궁극적 실재란 없으며, 현상 그 자체가 궁극적 실재임을, 그리고 궁극적 원리와 실재는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확인한다. 不二非一(불이비일), 眞空妙有(진공묘유), 色卽是空 空卽是色(색즉시공 공즉시색)인 부처의 세계와 노자의 그것이 어찌 다르겠는가! 玄이 衆妙之門이라는 것은, 有를 통해서 無를 확인한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無와 有, 두 세계를 잇는 길목에 내질린 빗장을 끄르는 데 선불교의 3조 승찬(僧瓚)대사가 남긴 <신심명(信心銘)> 한 구절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至道無難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며

唯嫌揀擇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但莫憎愛   미워하고 사랑하는 분별심만 버린다면

洞然明白   저절로 명백해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