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빛과 조화롭고 티끌과도 하나 된>
道冲而用之 或不盈 淵兮 似萬物之宗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湛兮 似或存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道는 허공과 같아서 그 쓰임에 모자람이 없다. 심연처럼 깊음이여, 만물의 근원인 듯싶다. 날카로운 끝을 무디게 하며 어지러이 얽힌 것을 풀어준다. 빛과 조화를 이루며 티끌과도 하나가 된다. 고요하고 넉넉함이여, 마치 존재하는 듯싶다. 누구의 자식인지 알 수 없으나 하늘보다 먼저 있는 듯하다.
道冲而用之 或不盈 淵兮 似萬物之宗(도충이용지 혹불영 연혜 사만물지종)
허공은 인간의 지혜로는 그 크기를 결코 가늠할 수가 없는 존재이다. “허공은 능히 일월성신과 대지산하와 모든 초목과 악한 사람과 착한 사람과 악한 법과 착한 법과 천당과 지옥을 그 안에 모두 품고 있다. 세상사람의 자성이 빈 것도 또한 이와 같다.” 선불교의 6조 혜능(慧能) 선사의 말처럼, 道도 이와 같아서 수없이 만물을 낳고 기른다 해도 그 품에서 넘치게 하지 않는다.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못[淵]과 그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넉넉한 강물[湛]은 이 세상 모든 만물의 젖줄이다. 或과 似는 분별적 이성과 합리적 추론으로는 닿을 수 없는 직관과 체험의 영역인 道를 언어로써 굳이 표현해야만 하는 곤혹스러움을 가리킨다. 1장에서 말했듯 그저 신묘하고 신묘할 따름인[玄之又玄] 道의 세계를 어설픈 인간의 언어로 어찌 드러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즉, 불가피하게 비유와 상징으로 그 길을 열어가고자 하는 노력이 가상할 뿐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언어의 본질적 한계와 내재적 속성을 차연(差延 ; 차이[差異]와 연기[延期])으로 정의했다. 일테면 ‘사람’과‘개’의 경우, 두 낱말이 그 지시대상의 본질을 정확하게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다만 둘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는 형식적 관계에 의해서 정의될 따름이다. 그러므로 의미의 가능성은 필연적으로 지연될 수밖에 없다. ‘사람’의 본질적인 의미는 그를 둘러싼 온갖 사물들과의 형식적 관계의 표면에서 끝없이 미끄러질 뿐이다.‘사람’이 가리키는 대상의 본질,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는 결코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나’는 무엇인가, 어떤 존재인가.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
銳는 사물의 성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분법적인 사고를 뜻하는 것이라 해석함이 좀더 옳을 듯싶다. 그렇다면 粉은 미처 분화되기 이전의 흐리멍텅한 의식상태-불교에서 무기(無記)라고 일컫는-로 보아도 무방하겠다. 날카롭게 각을 세우는 분별적 지식, 의식이랄 것도 없는 흐릿한 미몽(迷夢), 이 모두를 道는 감싸안고 ‘큰 지혜’로 다듬어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되게 한다. 이는‘번뇌가 깨달음의 씨앗’이라는 禪家의 가르침과 전혀 다르지 않다. 光은 빛ㆍ출세간(出世間)ㆍ지혜, 塵은 티끌ㆍ세속ㆍ어둠ㆍ번뇌 등을 의미한다. 道는 無의 세계와 有의 세계를 함께 껴안고 나아간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道는 욕망으로 들끓는 이 세상, <지금, 여기>와 동떨어진 저 높고 먼 낯선 곳에 있지 않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道 또한 세상 속에서 함께 어우러져 뒹구는 것이다.
“법은 원래 세간(世間)에 있어 세간에서 세간을 벗어나나니, 세간을 떠나지 말며 밖에서 출세간의 법을 구하지 말라. 삿된 견해가 세간이요, 바른 견해가 출세간이니 삿됨과 바름을 모두 물리치면 깨달음의 성품이 완연하리로다.”
이 또한 6조 혜능 선사의 게송이다.
湛兮 似或存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담혜 사혹존 오부지수지자 상제지선)
帝를 하늘이라 옮겼는데, 고대인에게 하늘은 곧 의인화된 인격신의 모습으로 서 있다. 그런 즉, 天帝, 上帝라 옮겨도 별 무리가 없겠다. 고대의 사유는 무척 매혹적이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고 타자화(他者化)한 현대인에게 자연은 인간과 연속선상에 있지 않다. 그러나 3재(才)로 표현되는 고대의 하늘[天]ㆍ땅[地]ㆍ人[사람]은 생명이라는 원초적 맥락에서 순환의 연결고리를 지니고 있다. 그 생명의 고리는 둥근 원[O]으로 시작과 끝이 없고(無始無終), 태어남과 사라짐이 없다(不生不滅). 하늘에서 내린 물은 만물의 뿌리를 적시어 온갖 생명을 탄생시키고, 땅은 그 생명이 제 몫을 다하도록 버팀목이 되어 준다. 생명은 주어진 몫을 다한 후 다시금 한줌 흙과 물, 바람이 되어 하늘과 땅으로 돌아간다. 그리고는 다시금 인연을 좇아 생명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佛家의 화두집인 <벽암록(碧巖錄)>에서 한 선사는 깨달음의 경지를 이렇게 읊었다.
一花開 世界起 한 송이 꽃이 열릴 때 세계가 진동하고
一塵擧 大地收 한 톨 먼지 속에 대지가 담겨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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