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와 똥막대기(도덕경 해설)

도덕경 3장. 욕망의 좌표 위에서 배회하는 삶

slowdream 2007. 8. 10. 17:12
 

<제 3장. 욕망의 좌표 위에서 배회하는 삶>


不尙賢 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不見可欲 使民心不亂 是以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常使民無知無欲 使夫智者不敢爲也 爲無爲則無不治


훌륭하다며 떠받들지 않으면 다툴 일이 없어진다. 얻기 어려운 재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훔치는 일이 없어진다. 욕심낼 만한 것을 보이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이 어지럽지 않다. 그러므로 성인의 다스림은 그 마음을 비우고 배를 가득 채우며, 그 뜻을 약하게 하고 뼈를 튼튼하게 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지식도 욕망도 비워내고 똑똑한 척하는 사람들이 감히 나서지 못하게 한다. 무위로써 행하면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없다.



不尙賢 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不見可欲 使民心不亂(불상현 사민부쟁 불귀난득지화 사민부위도 불견가욕 사민심불란) 

 

  여기에서 또한 노자는 중심의 철학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儒家에서 높이 받드는 仁義(인의) 등의 덕목을 비난하는 듯도 싶다. 윤리도덕을 강조하는 것은 뒤집어서 윤리도덕의 결핍과 부재를 고백하는 것에 다름 아니며, 그 결핍과 부재는 유위로써는 결코 메꿀 수 없다는. 거친 비유지만, 儒家를 높이와 중심의 철학이라 한다면, 道家는 깊이와 해체의 철학이라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佛家는 표면의 철학, 中道의 철학일 터이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지 않는 표면. 둘이면서 하나인,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표면.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이다. 욕망의 좌표 위에서 초초하게 배회하며, 그 꿈을 현실에 옮기고자 몸부림치는 존재이다. 現實은 뒤집으면 實現이다. 그렇다면 현실은 늘 실현되는가? 욕망의 눈금에 따르면 현실은 늘 2% 부족하다.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힘이 요구된다. 그 힘은 바로 이름이며 자리이며 권력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현실은 이름, 자리, 권력을 쥐기 위한 어김없는 투쟁의 장이다. 잔뜩 부풀어오른 욕망에 덜미를 잡혔을 때는 세상과 자신을 동일시하지만, 욕망이 좌절되는 순간 세상과 자신과의 거리는 끝없이 멀어져만 간다. 사랑하는 사람이 등을 돌렸을 때, 시험에 떨어졌을 때, 주위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높은 자리에 앉지 못할 때, 좀더 비싼 차를 타지 못할 때……. 노자는 통속(通俗)과 이기(利己)가 가득한 세상으로 던진 눈길을 접으라고 넌지시 충고한다. 그렇다고 해서 세속과 멀리 떨어진 은둔의 삶을 추구하거나, 세속 한가운데에서 은폐된 삶을 꾸리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욕망으로 흐려진 눈을 맑게 씻어내는 바로 그 순간, 삶의 참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니.


是以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시이성인지치 허기심 실기복 약기지 강기골) 

 

 노자는 세태에 만연한 통속적 가치와 이해를 뒤집는다. 말하자면 그 또한 전복(顚覆)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존재론적, 인식론적 혁명의 꿈이다. 心과 志는 여기에서 욕망의 동의어이다. 그렇다면 배와 뼈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욕망이 아닌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욕구, 의식주를 뜻하는 것일까? 당대의 중국 현실을 살펴보자면, 낮은 생산력, 뿌리 깊은 계급적 질서, 일상화된 전란과 혼란 등일 것이다. 말하자면 지배계급은 몰라도 피지배계급에게는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절실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세속적 욕망에 몸부림치는 지배계급과 거기에 영합하는 지식인 부류를 비웃는 노자의 입장에서 굶주린 민중들을 외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상 너머 道의 세계를 추구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배와 뼈는 自然이며, 自然은 道의 궁극적 실현인 현실적 대상이므로, 다시 말해 道의 비유이다. 배를 채워주고 뼈를 튼튼하게 하는 성인의 다스림은 無爲之爲(함이 없는 함), 道의 실천이다. 


常使民無知無欲 使夫智者不敢爲也 爲無爲則無不治(상사민무지무욕 사부지자불감위야 위무위즉무불치) 

 

  智者는 곧 지식인일 터이다. 당대의 대표적인 지식인 공자(孔子)를 가리킨 것인지도 모르지만, 노자를 실존인물로 여기지 않고, <도덕경>의 저자를 여러 세대에 걸친 익명의 복수로 이해한다면 춘추전국시대에 저마다 목소리를 높인 제자백가(諸子百家)를 겨냥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하간 노자는 이분법적인 분별적 지식과 그리고 그러한 잣대로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겠다는 헛된 욕망은 가차 없이 무시하고 무지와 무욕의 삶을 권한다.

 

  한 스님이 조주(趙州) 선사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조주 선사 왈,

“없다[無].” 

  과연 없는가? 없음은 무엇이고 있음은 또 무엇인가. 오늘 하루 ‘無’자(字) 화두(話頭)에 빠져보는 것은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