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와 똥막대기(도덕경 해설)

도덕경 2장. 앞과 뒤가 서로 따르니

slowdream 2007. 8. 10. 17:10
 

<제 2장. 앞과 뒤가 서로 따르니>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여기는 것은 이미 추함이 있기 때문이며, 선을 선으로 여기는 것 또한 선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無와 有는 서로의 관계에서 비롯하며, 어렵고 쉬움도 서로의 관계에서 생기며, 길고 짧음도 서로 비교되는 것이며, 높고 낮음도 서로 기울어지는 것이며, 노랫가락과 목소리도 서로 어울리며, 앞과 뒤도 서로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무위로써 일을 처리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한다. 만물을 다스리되 사양하지 아니하며, 가꾸되 소유하지 아니하며, 할 바를 다하나 자족하지 아니한다. 공을 이루되 주장하지 아니하며, 그런 까닭에 공이 헛되지 아니한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천하개지미치위미 사악이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아름다움과 추함, 선함과 악함은 절대적 경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가치에 지나지 않다. 아름다움은 추함이 존재하기에 아름다운 것이며, 또한 충분히 아름답다 하더라도 더 아름다운 대상과 비교될 때는 추해지는 것이다. 이들 상대적 가치는 불변의 내재적 속성이 아니라, 시비(是非)와 득실(得失)을 가늠하는 분별심에서 비롯한다. 요새와 달리 춘추시대에는 惡이 ‘추함’의 의미로 쓰였으며, 善의 상대어는 惡이 아니라 不善이었다. 不善이라는 낱말에서 알 수 있듯 당시에는, 善을 중심에 놓고 그 중심과의 거리에 따라 위계를 정하는 ‘정도의 철학’이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즉 5%의 불선, 80%의 불선 등의 가치평가가 존재에 매겨지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가치론>은 시대적 요구에 따라 그 중심에 신(神-신학), 인간(人間-휴머니즘), 노동(勞動-유물론), 자본(資本-자본주의) 등으로 자리바꿈을 하며 역사적 변천을 계속해 왔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Platon) 또한 이 ‘정도의 철학’을 주장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사유란 고금(古今)과 동서(東西)를 막론하고 일정하게 동일한 궤적을 그리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정도의 철학’은 중심과 그 바깥에 불연속적인 경계를 설정함으로써 인간에게 종종 소외감과 죄의식, 박탈감, 무력감 등을 안겨준다는 데서 부정적인 영향이 적지 않다.

 

  신라의 고승 원효(元曉) 스님이 42세에 의상 스님과 함께 당나라에 가려고 길을 서두르다 하룻밤 무덤에서 지낸 일화는 모두 익히 알고 있을 터이다. 한밤중 목이 말라 무덤 밖 못가에서 바가지 비슷한 물체로 물을 떠먹고 갈증을 삭인 후 다시 잠들었는데, 다음날 깨어보니 그 바가지가 바로 해골이었던 것이다. 욱! 심하게 구토를 한 순간 스님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때의 오도송(悟道頌)을 여기 옮겨보자.


心生則種種法生    마음을 일으키니 온갖 법이 일어나고

心滅則髑髏不二    마음을 거두니 샘물과 해골물이 둘이 아니로다

三界唯心萬法唯識  삼계는 오로지 마음이요 만법 또한 의식인데

心外無佛胡用別求  마음 밖에 부처가 없으니 어찌 따로 부처를 구하랴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고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교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굽은 것은 굽은 나름대로 곧고, 곧은 것은 곧은 나름대로 굽다. 無와 有, 어려움과 쉬움, 길고 짧음, 높고 낮음 등 상대적 가치에 대한 사고를 禪家에서는 변견(邊見)이라 일컫고 강하게 부정한다. 이분법적인 극단의 사고를 버리고 中道의 사고를 택하라는 것이다. 안팎이 따로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시이성인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무위는 작위적이고 인위적이지 않은 실천적 태도로, 道로 나아가는 길목이다. 佛家에서 말하는 我相(아상), 자기중심적인 가치판단의 태도를 버리라는 것. 나 자신과 세상 사이에 놓인 거리를 무화시키라는 것. 無有爲(함이 없는 함)는 곧 無不爲(못함이 없는 함) 아니겠는가. 물고기가 물에서 놀듯, 새가 허공을 휘젓듯 ‘걸림없는 삶’이다. 聖을 해자(解字)하면, 耳[귀]와 口[입]와 壬[아홉째천간, 큰물]으로 이루어져 있다. 귀로 생명의 근원인 물소리 또는 신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에게 전한다, 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壬은 원래 人[사람]과 土[흙]의 합성어로 베틀을 형상했으나, 본래의 의미는 퇴색하고 일찌감치 간지를 나타내는 글자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거기에 人을 더한 任(임)은 어떤 일을 맡은 사람이라는 뜻인 즉, 壬을 任으로 보아서 聖을 생명의 근원인 말씀을 듣고 전하는 사람이라 해석해도  큰 무리는 없을 터이다. 그렇다면 왜 눈[目] 아닌 귀일까? 눈은 가시적(可視的)인 감각기관이며, 귀는 비가시적(非可視的)인 감각기관이다. 눈앞에 드러난 사물의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고, 고요히 눈을 감은 채 만물의 근원, 생명의 근본인 소리, 우주의 저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소리, 그 신묘한 無의 울림에 귀를 기울이는 그런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가?

 

  不言之敎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을 자연스레 연상시킨다. 영산(靈山)에서 범왕(梵王)이 부처에게 설법을 청하며 연꽃을 바치자, 부처가 연꽃을 들어 대중들에게 보였다. 대중들은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으나, 가섭(迦葉)만은 참뜻을 깨닫고 미소로써 답했다는 염화미소(拈花微笑)! 너와 나, 세계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 그 거리를 한순간 무너뜨리고 하나되는 순간. 너와 나, 세계의 주파수가 일치하는 그 순간 우리 모두의 표정에는 가섭의 미소가 떠오르리라.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만물작언이불사 생이불유 위이불시 공성이불거 시이불거)

 

  作과 生을 ‘짓고, 낳다’보다는 ‘다스리다, 가꾸다’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적합해 보인다. 이 구절은 無爲之事의 부연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