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와 똥막대기(도덕경 해설)

도덕경 73장. 하늘 그물은 엉성하지만 놓치지 않는다

slowdream 2007. 8. 11. 01:46
 

<제 73장. 하늘 그물은 엉성하지만 놓치지 않는다>


勇於敢則殺 勇於不敢則活 此兩者 或利或害 天之所惡 孰知其故 是以聖人猶難之 天之道 不爭而善勝 不言而善應 不召而自來 繟然而善謀 天網恢恢 疏而不失


살고자 하는 용기는 죽을 것이요, 살고자 하지 않는 용기는 살 것이다. 이 둘은 어떤 때는 이것이 이롭고 저것이 해롭지만 또 어떤 때는 이것이 해롭고 저것이 이롭다. 하늘이 꺼리는 것 누가 그 까닭을 알겠는가. 그러므로 성인 또한 어렵게 여긴다. 하늘의 도는 이러하다 ; 다투지 않고도 잘 이기며, 말하지 않아도 훌륭히 응해주고, 부르지 않아도 절로 찾아오며, 느릿하면서도 잘 도모한다. 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어 엉성하지만 결코 놓치지 않는다. 



勇於敢則殺 勇於不敢則活 此兩者 或利或害 天之所惡 孰知其故 是以聖人猶難之(용어감즉살 용어불감즉활 차양자 혹리혹해 천지소오 숙지기고 시이성인유난지) 

 

  勇於敢則殺 勇於不敢則活 또한 해석이 여러 갈래로 나뉜다. ‘감히 나아가 죽고자 하는 용기와 감히 나아가지 않음으로써 살고자 하는 용기’ ‘감히 하는 용기는 살 것이요, 감히 하지 않는 용기는 살 것이다’ 등등. 허나 필자는 춘추전국시대 위나라의 병법가(兵法家) 오기(吳起)의 저서 <오자병법(吳子兵法)>에 나온 “必死則生 幸生則死(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요, 요행히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를 다분히 의식한 글이라고 여긴다. 이순신 장군과 안중근 의사가 인용해서 유명해진 문구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살고자 하는 용기는 죽을 것이요, 살고자 하지 않는 용기는 살 것이다’로 옮겼다. 이는 어디까지나 시비와 득실이 분명히 가름되는 유위인 까닭에 어느 것이 진정한 용기인지는 명확히 구분할 수 없으며, 다만 상황에 따라 그 이해가 엇갈릴 따름이다.

 

  그러므로 道를 섬기는 하늘과 성인은 꺼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용기는 儒家의 실천덕목인 仁義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中道의 입장에서 보자면, 죽음은 삶이요, 삶은 곧 죽음이다. 삶과 죽음 어느 하나가 아니라 이 모두를 품는 것, 깨달음을 위해서 몸과 마음을 기꺼이 내던질 수 있는 태도가 바로 용기인 것이다. 물론 통속적인 이해는 상황에 따라 어느 하나의 선택을 요구하고 그에 걸맞는 가치를 부여한다. 그럼으로써 열부(烈婦)와 효자, 충신이 나오는 것이다.


天之道 不爭而善勝 不言而善應 不召而自來 繟然而善謀 天網恢恢 疏而不失(천지도 부쟁이선승 불언이선응 불소이자래 단연이선모 천망회회 소이불실) 

 

  하늘은 공평하다. 그런 까닭에 다퉈 우세한 사람의 편을 들지도 않고, 말을 해야 답을 주는 것도 아니고, 불러야 오는 것도 아니며, 밤낮 안 가리고 치밀하게 궁리해야 좋은 계책을 주는 것도 아니다. ‘저 친구는 운이 좋아’라는 얘기는 하늘의 이법을 무시하는 유위의 태도이다. 유위의 삶은,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하다. 그런 까닭에 내가 누리는 명예와 재복은 내 노력의 결과이지만, 상대의 명예와 재복은 운에 지나지 않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운(運)은 흔히 얘기하듯 ‘우연한 횡재’의 의미가 결코 아니다. 인과법칙의 필연이 바로 운이다. 무위의 삶은 나와 남을 가르지 않으며, 통속적인 가치를 부여하지도 않는다. 명예와 부는 통속적인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복이지만, 무위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재앙이다. 명리(名利)를 돌보는 데 바빠 道를 섬기고 실천할 수 있는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天網恢恢 疏而不失도 <도덕경>에서 널리 알려진 문구 중의 하나이다. 하늘의 이법은 겉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더없이 촘촘한 그물이어서 그 어떤 사물도 벗어나지 못한다. 허공은 텅 빈 듯싶지만, 천지와 해ㆍ달ㆍ별ㆍ산천초목과 온갖 생명들을 모두 품고 있듯이. 그러므로 선택적으로 하늘의 질서가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존재 자체가 바로 이법이며, 질서이니. 그리하여 道를 ‘존재의 안감’이라 하지 않았던가. 존재 없이 道가 없고, 道 없이 존재는 없다.

 

  ‘하늘 그물’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적용한다면,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일은 모두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결과임을 뜻한다. 말하자면 인간은 모두 인과법칙의 포로이다. 향 싼 종이에서는 향내음이 나고 생선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난다. 그러나 금생에 펼쳐지는 것만으로 인과를 논해서는 곤란하다. 인과를 무시하는 사람에게 왜 당신은 ‘지금, 여기’ 있느냐고 물어보자. 오늘은 어제의 결과요, 오늘은 내일의 원인이다. 그렇듯 금생은 전생의 결과이며, 후생의 원인이다. 전생의 자취를 따라 금생이 펼쳐진 것이며, 금생에 남기는 흔적이 후생의 문을 열어젖힌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일은 없는 것이다.

  죽음에 대해 걱정이 많은 한 사람이 대주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몸이 죽은 후에도 마음이 있습니까?”

“몸은 마음 따라 있는 것이니, 몸이 죽는다고 어찌 마음이 없겠느냐?”

“그렇다면 그 마음을 제게 보여 주십시오.”

  대주 스님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내일 아침이 있다는 것을 아느냐?”

“네, 압니다.”

“그렇다면 내일 아침을 나에게 보여주겠는가?”

“분명히 있긴 하지만 보여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 보아라. 장님이 해를 보지 못한다고 해서 해가 없다고 하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