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2장.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
民不畏威 則大威至 無狎其所居 無厭其所生 夫唯不厭 是以不厭 是以聖人自知 不自見 自愛 不自貴 故去彼取此
백성이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지배계급은) 더 큰 권위로써 누른다. 그러나 백성이 거처하는 곳을 가까이 하지 말며, 그들의 삶을 억누르지 말아야 한다. 무릇 억누르지 않기에 싫증을 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스스로 알기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 사랑하기에 자신을 귀히 여기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앞의 것을 버리고 뒤의 것을 취한다.
民不畏威 則大威至 無狎其所居 無厭其所生 夫唯不厭 是以不厭(민불외위 즉대위지 무압기소거 무엽기소생 부유불엽 시위불염)
狎은 ‘친숙하다, 낯익다’ 라는 뜻인데, ‘누르다, 단속하다’의 뜻인 押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하겠다. ‘그 거처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백성이 말을 듣지 않는다 해도 더한 권위로써 다가가 억눌러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厭은 ‘누르다’일 때는 ‘엽’으로 발음하고, ‘싫증내다’일 때는 ‘염’으로 발음한다. 백성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지배자는 ‘어, 이것 봐라’ 하면서 더욱 고삐를 당긴다. 이런저런 도덕적, 법률적 장치를 더욱 많이 늘어놓음으로써 발목을 낚아채려 애쓰는 것이다.
“천하에 꺼리는 것이 많을수록 백성은 더욱 곤궁해진다. 사람들에게 이로운 도구가 많을수록 나라는 더욱 혼미해진다. 사람들에게 잔재주가 많을수록 부정한 물건이 많아지고, 법이나 명령이 화려할수록 도적은 많아진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하길, 내가 함이 없으므로 백성이 절로 교화되고,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므로 백성이 절로 바르게 되고, 내가 일을 꾸미지 않으므로 백성이 절로 부유해지고, 내가 욕심이 없으므로 백성이 절로 질박해진다.” 57장에서 무위를 설명한 것인데, 위와 같은 맥락이다. 무력을 앞세우는 공포정치, 법률로 목을 죄는 법치는 단기적인 효과는 매우 크다. 일종의 충격요법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17장에서 얘기했듯이 이러한 다스림을 즐기는 지도자는 하급에 속한다.
춘추전국시대에 오나라 왕 합려(闔廬)가 유명한 병법가인 손무(孫武)를 불렀다. <손자병법(孫子兵法)>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텐데, 손무가 바로 그 저자이다.
합려가 손무에게 말했다.
“그대가 쓴 병법 13편을 모두 읽어보았네. 이것을 실제로 훈련해 볼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손무는 합려에게 궁녀 180명을 불러달라고 요청하고 이들을 두 부대로 편성한 후 왕이 총애하는 궁녀 둘을 대장으로 삼았다.
“만약 내 명령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군법으로 다스리겠다.”
손무는 궁녀들에게 단호하게 말하고, 지시를 내렸다. 앞으로 나아가라는 북소리가 울렸지만, 궁녀들은 장난으로 여긴 탓에 여기저기서 웃음을 터뜨렸다.
손무가 대장인 궁녀 둘을 불러 엄숙하게 나무랐다.
“명령을 확실히 전달하지 못해 병사들이 잘 따르지 못하게 된 것은 장군인 그대들의 잘못이다. 두 번 다시는 실수가 없도록 하라.”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나아가라는 지시를 내렸다. 북소리가 울리자, 이번에는 아까보다도 더 큰 웃음이 궁녀들 사이에서 터져나왔다.
그러자 손무는 대장인 궁녀 둘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병사들을 제대로 이끌지 못한 죄로, 너희가 그 벌을 받아야 한다!”
손무는 군사를 불러 궁녀 둘의 목을 베라고 명령했다. 궁녀들이 끌려 나와 무릎을 꿇자, 합려는 허겁지겁 손무를 말렸다.
“이제 그대의 실력을 알았으니, 그만 노여움을 풀고 처벌을 멈추게.”
하지만 손무는 단호했다.
“소인은 왕명을 받은 장군이나, 전장에서는 군법에 따라 병사를 다스릴 따름입니다. 어서 목을 쳐라!”
결국 두 궁녀는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어 손무가 다른 두 궁녀를 대장으로 뽑아 북소리에 맞춰 호령하니, 새파랗게 질린 궁녀들은 명령대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손무가 합려에게 말했다.
“이제 훈련을 마쳤으니 직접 명령을 내리시지요. 물불을 안 가릴 겁니다.”
합려는 입맛이 썼지만 손무의 병법이 뛰어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에 결국 장군으로 삼았다.
是以聖人自知 不自見 自愛 不自貴 故去彼取此(시이성인자지 불자견 자애 불자귀 고거피취차)
스스로 알기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 사랑하기에 자신을 귀히 여기지 않는다는 얘기는 7장의 “성인은 자신을 뒤로 하기에 앞서고, 그 몸을 아끼지 않기에 몸을 보존한다. 나를 비움으로써만이 나를 완성하는 것 아니겠는가”와 같은 의미이다. ‘앞의 것을 버리고 뒤의 것을 취한다’는 결국 유위를 물리치고 무위를 내 것으로 한다는 의미이겠다. 이는 물러섬으로써 나아가고, 숨김으로써 밝아지는 것 아니겠는가. 자족(自足)하는 삶은 내 밖의 누구에게서 인정(認定)을 받고자 할 까닭이 없다. 삶을 인정투쟁이라 여기기도 하는데, 명리(名利)를 다투는 것이 곧 그것이겠다. 허나 스스로 알고 스스로 사랑하는데, 그 무슨 인정이 필요하겠는가. 무소유의 삶, 존재론적인 삶은 바깥의 인정을 요구하지 않는 삶이다. 이는 한마디로 ‘머무르지 않는 삶’이다.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以生其心
마땅히 형체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마땅히 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마음의 대상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요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 가운데 하나이다. 머무름이 없고 걸림이 없는 삶이란, 마치 거울처럼 어떤 사물이 다가와도 다만 비칠 뿐 사물이 지나가면 그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물이 그렇고 바람 또한 그러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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