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와 똥막대기(도덕경 해설)

도덕경 75장. 길에는 얼어죽은 사람들의 뼈가 나뒹굴고

slowdream 2007. 8. 11. 01:47
 

<제 75장. 길에는 얼어죽은 사람들의 뼈가 나뒹굴고>


民之饑 以其上食稅之多 是以饑 民之難治 以其上之有爲 是以難治 民之輕死 以其上求生之厚 是以輕死 夫唯無以生爲者 是賢於貴生


백성은 굶주린다. 윗사람이 세금을 너무 많이 받아먹는 탓에 백성이 굶주린다. 백성은 다스리기 어렵다. 윗사람이 유위로써 다스리는 까닭에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다. 백성은 죽음을 가벼이 여긴다. 윗사람이 삶에 집착하기 때문에 백성이 삶을 가벼이 여긴다. 삶을 귀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삶을 귀히 여기는 사람보다 현명하다.



民之饑 以其上食稅之多 是以饑 民之難治 以其上之有爲 是以難治 民之輕死 以其上求生之厚 是以輕死 夫唯無以生爲者 是賢於貴生(민지기 이기상식세지다 시이기 민지난치 이기상지유위 시이난치 민지경사 이기상구생지후 시이경사 부유무이생위자 시현어귀생) 

 

  굶주림과 죽음.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대립과 투쟁은 그 형식을 달리할 뿐, 역사 속에서 늘 되풀이된다. ‘분배냐 성장이냐’의 논의도 결국은 뺏고 뺏기지 않으려는 다툼에 다름 아니다. 춘추전국시대의 현실을 생생하게 표현한 기록은 적지 않다. <시경(詩經)>이나 <사기(史記)>, <논어(論語)>ㆍ<맹자孟子)>ㆍ<묵자(墨子)>ㆍ<장자(莊子)> 등 제자백가의 저서와 그 밖의 역사서 곳곳에 여실하게 드러나 있다. 허나 춘추전국시대보다 무려 1천여 년이 지난 당나라 때의 시인이지만, 두보(杜甫)만큼 굶주리고 고달픈 민중들의 애환을 절절하게 묘사한 사람도 없는 듯싶다. 5백자로 이루어진 긴 작품이라 일부만 소개해 본다.


……

지금 조정에서는 인재들 많아

큰 집을 짓는데도 모자람이 없건만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하듯

그 본성을 빼앗을 수는 없어라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들을 생각하면

단지 거처할 구멍만 구하면 될 것을

어쩌자고 큰 고래를 사모하여

항상 그를 흉내 내어 넓은 바다로만 나가려 하는가

……

음악소리 아득히 울려 퍼진다.

목욕하는 이는 모두 갓끈 긴 사람들이고

잔치에 참여한 이도 백성들은 아니구나

궁궐에서 비단을 하사하는데

이는 본래 가난한 집 아낙에게서 나왔을 테지

그 남편과 가족을 매질하여

모질게 거둔 것을 공물로 대궐에 바친 것이리

……

붉은 문 안에서는 술과 고기 냄새요

길에는 얼어죽은 사람들의 뼈가 나뒹군다

……

문에 들어서니 부르며 우는 소리 들린다

어린 아들이 굶주려 죽고야 말았구나

내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으리

마을 사람들도 역시 흐느껴 우는구나

부끄럽다, 사람의 아비가 되어서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게 만들다니

가을이라 벼도 거두었건만

가난한 집에는 이런 변고 당하는구나

……

<봉선현으로 가는 길>


  여기서는 유위로써 다스리기 때문에 백성이 다스리기 어렵다고 했지만, 65장에서는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그들의 지혜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리면 도적이 되며, 지혜로써 다스리지 아니하면 복이 된다” 라 했다. 유위는 차별적인 분별지이며, 이러한 통속적인 지식은 또한 권력에 다름 아니다. 이는 정보화시대인 요즘에만 국한되는 얘기는 아니다. 과거에도 지식을 생산하고 소유하는 계층은 권력의 일부였다. 지식을 소유하지 못하고 그 생산과정에 참여하지 못하면 권력의 분배에서 소외된다. 과거에 비해 요즘은 그 지식의 보편적 소유가 상당히 이루어졌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노자는 이러한 현실을 개탄할 것이다. 지식의 보편적 향유가 아닌 전면적인 부정을 궁극적으로 목적했던 것 아니겠는가. 유위로써의 지식은 道를 등지며 멀어져가는 걸음에 지나지 않기에.

 

  “자는 사람은 깨울 수 있지만, 자는 척하는 사람은 깨울 수 없다”는 옛말이 새롭게 다가온다. 유위의 분별적 지식에서 소외된 무지한 사람은 오히려 물들지 않았기에 곧바로 道에 다가갈 수 있으나, 이분법적인 지식에 물든 지식인들은 그 알음알이로 인하여 오히려 발목이 잡히는 탓에 道에 다가가기 힘든 것이다. 그런 까닭에 71장에서 “앎이 아님을 앎이라 여기는 것은 병이다”라며 지식인의 병폐를 통렬하게 비난한 것이 아니겠는가. 48장에서 “배움의 길은 날로 쌓아가는 것이며, 道의 길은 날로 덜어내는 것이다”’라 했듯, 소유론적인 삶의 길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삶의 길을 택해야 노자의 가르침에 옳게 따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백성이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삶과 죽음의 이분법적인 경계가 허망한 것임을 깨달아서가 아니다. 지배계급의 착취와 억압이 극렬하여, 살아 있는 순간이 고통스러운 때문이다. 인간으로 태어남을 원망하는 백성의 슬픔과 고통을 노자는 따뜻하게 어루만지며 위로한다. ‘삶을 귀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삶을 귀히 여기는 사람보다 현명하다.’ 가진 것이 없으므로, 버릴 것도 없고, 그리하여 道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에. 그러나 이러한 위로는 전제를 요구한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통해서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노력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