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와 똥막대기(도덕경 해설)

도덕경 76장. 그대도 나도 한바탕 꿈에 젖어 있으니

slowdream 2007. 8. 11. 01:47
 

<제 76장. 그대도 나도 한바탕 꿈에 젖어 있으니>


人之生也柔弱 其死也堅强 萬物草木之生也柔脆 其死也枯槁 故堅强者死之徒 柔弱者生之徒 是以兵强則不勝 木强則折 强大處下 柔弱處上


사람의 삶은 부드럽고 여리나 그 죽음은 굳고 강하다. 온갖 것과 풀과 나무의 삶은 부드럽고 여리나, 그 죽음은 메마르고 뻣뻣하다. 그런 까닭에 굳세고 강한 자는 죽음의 무리이며, 부드럽고 약한 자는 삶의 무리이다. 그러므로 군대는 강하면 이기지 못하며, 나무는 강하면 부러진다. 강하고 큰 것은 밑에 자리하며, 부드럽고 여린 것은 위에 자리한다.



人之生也柔弱 其死也堅强 萬物草木之生也柔脆 其死也枯槁 故堅强者死之徒 柔弱者生之徒 是以兵强則不勝 木强則折 强大處下 柔弱處上(인지생야유약 기사야견강 만물초목지생야유취 기사야고고 고견강자사지도 유약자생지도 시이병강즉불승 목강즉절 강대처하 유약처상) 

 

 이제껏 누누이 강조되어 온 탓에 익숙한 비유이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이기도 하겠지만, 어찌 보면 사족(蛇足)에 지나지 않다. 그리고 자칫 삶을 찬미하는 송가로 들리기도 한다. 부드러움과 강함을 대조시켜서 강함과 약함의 일반적인 이해를 전복시키는 것까지는 좋으나, 삶과 죽음의 비유는 썩 마땅치 않다. 삶과 죽음은 상보적이며 끝없이 순환한다는 道의 이치를 깨닫자는 노자의 외침과는 일관성이 약해 보인다. 50장에서 펼친 삶과 죽음의 비유와는 사뭇 다르다. “나옴이 삶이요 들어감이 죽음이다……호랑이도 그 발톱으로 할퀼 곳이 없고, 무기도 그 칼날을 휘두를 곳이 없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에게는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을 가름하지만, 실상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엇인지 우리는 모른다. 장자는 그 유명한 ‘나비꿈의 우화(胡蝶之夢)’를 통해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화시킨다.  

 

“어느날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데 참으로 즐거운 까닭에 자신이 장자라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잠에서 깨어나 보니 자신은 장자였다. 대체 장자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서 장자가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장자와 나비에는 분명한 구분이 있다. 이를 사물의 변화라 한다.”

 

 나비였던 꿈이 현실이며, 반면에 지금 스스로를 인간으로서 여기는 현실이 나비가 장자인 자신으로 변한 꿈은 아닌 것인지 장자는 혼란에 빠져 있다. 꿈을 꾸기 전에는 꿈과 현실이 분명하게 선을 긋지만, 꿈을 꾸고 난 후에는 그러한 선이 사라져 버린다. 꿈과 현실이 뒤섞여, 무엇이 꿈이며 무엇이 현실인지 딱히 고집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장자는 그 혼란에서 곧 빠져나온다. 장자는 장자이고, 나비는 나비인 것이다. 22장에서 인용한 청원(靑原) 선사의 설법이 바로 나비꿈의 가르침이다.“노승이 삼십 년 전 참선하기 이전에는, 산을 보면 산이었고 물을 보면 물이었다. 그러나 선지식을 만나 깨달음을 얻고 보니,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요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니었네. 그러나 이제 참된 깨달음에 들어서고 보니, 산은 진정 산이요 물은 진정 물로 보인다. 이 세 가지 견해가 같겠는가, 다르겠는가?”

 

 장자는 나비꿈의 우화를 통해 제물론(齊物論), 즉 만물은 평등하다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사상을 피력한다. 이는 화엄의 사사무애(事事無碍), 원효의 화쟁(和諍) 사상과 다르지 않으며 곧 中道이다. 조선 숙종 때 김만중(金萬重)의 소설 <구운몽(九雲夢)>에서 주인공 성진이 또한 그러하듯이, 우리는 큰 깨달음이 있고 난 후에야 비로소 지금 이순간이 한바탕 꿈인 줄 깨닫는다. 노자도 장자도 모두 꿈을 꾸고 있다. 그들이 꿈을 꾸고 있다고 말하는 나 역시 꿈을 꾸고 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