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와 똥막대기(도덕경 해설)

도덕경 77장. 남은 것은 덜어내고 모자란 것은 보태는

slowdream 2007. 8. 11. 01:48
 

<제 77장. 남은 것은 덜어내고 모자란 것은 보태는>


天之道 其猶張弓與 高者抑之 下者擧之 有餘者損之 不足者補之 天之道 損有餘而補不足 人之道則不然 損不足以奉有餘 孰能有餘以奉天下 唯有道者 是以聖人爲而不恃 功成而不處 其不欲見賢


하늘의 道는 활을 잡아당기는 것과 같다. 높은 쪽은 누르고 낮은 쪽은 올린다. 남은 것은 덜어내고 부족한 것은 보태준다. 하늘의 道는 남은 것을 덜어내어 모자란 것에 보태나, 사람의 道는 그렇지 않다. 부족한 것에서 덜어내 남는 것에 바친다. 남는 것으로 천하를 받들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겠는가. 오로지 道를 지닌 사람뿐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일을 하되 그것에 의지하지 않고, 공을 이루되 내세우지 않고, 자신의 德을 드러내지 않는다.



天之道 其猶張弓與 高者抑之 下者擧之 有餘者損之 不足者補之 天之道 損有餘而補不足 人之道則不然 損不足以奉有餘(천지도 기유장궁여 고자억지 하자거지 유여자손지 부족자보지 천지도 손유여이보부족 인지도즉불연 손부족이봉유여)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로 나누어, 천도는 무위의 삶이요 인도는 유위의 삶임을 강조한다. 활을 잡아당기면 높은 쪽은 올라가고 낮은 쪽은 내려간다고 하였는데, 그 그림이 언뜻 떠오르지를 않는다. 39장의 “귀함은 천함을 근본으로 삼으며 높음은 낮음을 바탕으로 삼는다”와 같은 뜻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겠다. 어찌되었든 천도는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 높낮이가 없이 고루 평평하게 하듯 있는 사람의 주머니를 털어 없는 사람에게 보태지만, 인도는 없는 사람의 주머니를 털어서 있는 사람에게 더해준다. 인도의 뻔뻔한 행각은, 아홉 가진 사람이 하나 가진 사람더러 열을 채우게끔 되려 하나를 달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다. 말 그대로 무지막지(無知莫知)한 유위이다.

 

  “궁궐은 깨끗하고 화려하나 논밭은 잡초만 무성하다. 곳간은 텅 비었는데, 화려한 옷을 입고 허리에는 시퍼렇게 날선 칼을 차고 있다. 질리도록 음식을 먹고 재화는 넘치니 이 어찌 도둑이라 아니하겠는가. 진정 道가 아닐진저!”(53장)

 

  노자는 현실과 동떨어진 은둔의 철학자가 아니다. 그는 처참한 삶을 꾸리는 민중의 어깨를 부둥켜 안은 채 함께 슬퍼하고, 지배계급의 끝을 모르는 탐욕과 후안무치(厚顔無恥)한 행각에 분노한다. 그러나 ‘눈에는눈, 이에는 이’식의 투쟁을 권하지는 않는다. 투쟁은 현실을 개선시킬 수는 있으나, 진정한 道를 깨닫는 길과는 여전히 거리가 먼 것이다. 눈앞의 현실에 목말라하지 말고, 궁극적인 道의 길에 걸음을 내딛는 것이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를 진정 움켜쥐는 것이라 노자는 단언한다. 


孰能有餘以奉天下 唯有道者 是以聖人爲而不恃 功成而不處 其不欲見賢(숙능유여이봉천하 유유도자 시이성인위이불시 공성이불처 기불욕견현) 

 

  49장에서 그랬듯 “성인은 불변의 마음이 없으며, 백성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으므로”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세상에 되돌려준다. 그리하여 성인의 곳간은 유위의 눈에는 텅 비어 있으나, 무위의 눈에는 道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道는 아무리 써도 다함이 없기에, 천하에 성인만큼 넉넉한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성인은 무위로써 일을 처리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한다. 만물을 다스리되 사양하지 아니하며, 가꾸되 소유하지 아니하며, 할 바를 다하나 자족하지 아니한다. 공을 이루되 주장하지 아니하며, 그런 까닭에 공이 헛되지 아니한다.”(2장)

 

  선종의 대가 마조 선사 밑에 백장(百丈)이라는 제자가 있었다. 백장은 어릴 적에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갔다가, 불상을 보고서“부처님 모습이 사람과 같고 나와 다르지 않다”며 반드시 부처가 되겠다고 출가를 했다 한다. 백장 스님은 법력이 높음에도 결코 드러내지 않고 늘 자신을 낮추었다. 그의 법력을 인정한 마조 선사로부터 법을 이어받았으나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숨어 살았다. 그런 까닭에 마조 선사가 돌아가신 후에 비문을 세웠지만, 당대에 유명한 스님들의 이름은 빠짐없이 올랐으나 백장 스님의 이름만은 빠져 있다. 그럼에도 백장 스님의 이름은 조금씩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고, 마침내 따르는 대중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되자, 스님은 따로이 거처를 마련하고 대중들을 지도하였다. 그리고는 그때까지 아무런 규율이 없이 지낸 선종 살림살이에 틀을 만들어 따르게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백장청규(百丈淸規)>이다. 나이가 들어 거동이 힘들게 되었지만, 여전히 제자들과 함께 낮에는 밭에서 운력(雲力-선종에서의 수행방편의 하나로 여럿이 모여 노동을 하는 행위. 울력이라고도 한다)을 했다. 보다 못한 제자들이  농사 도구를 감추자, 스님은 출입을 금하고 끼니를 거르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 

 

  노자의 성인은 佛家의 선지식에 다름 아니겠다. 백장 스님의 법문을 통해 성인의 무위행을 좀더 확실하게 이해해 보자.

 

 “다만 일체의 有無法에 의지하고 머물지 아니하며, 또 의지하고 머물지 않음에도 머물지 아니하며, 또한 의지하고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짓지 않으면, 이를 선지식이라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