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불교/전심법요(傳心法要)

5. 허공이 곧 법신

slowdream 2007. 9. 9. 22:28
 

허공(虛空)이 곧 법신(法身)



言佛眞法身 猶若虛空 此是喩 法身卽虛空 虛空卽法身 常人謂法身遍虛空處 虛空中含容法身 不知法身卽虛空 虛空卽法身也


부처님의 참 법신은 마치 허공과 같다고 하는데 이는 비유이다.

법신이 곧 허공이요, 허공이 바로 법신인데

보통 사람들은 법신이 허공에 두루하고 있다고 하면

허공 가운데 법신을 포용하고 있는 줄 알고

법신이 바로 허공이며

허공이 바로 법신임을 모른다.


若定言有虛空 虛空不是法身 若定言有法身 法身不是虛空 但莫作虛空解 虛空卽法身 莫作法身解 法身卽虛空 虛空與法身無異相 佛與衆生無異相 生死與涅槃無異相 煩惱與菩提無異相 離一切相卽是佛


만약에 꼭 허공이 있다고 말한다면 허공은 법신이 아니요,

꼭 법신이 있다고 말한다면 법신은 허공이 아니다.

쓸데없이 법신에 대해 알음알이를 짓지 말라.


법신이 바로 허공이어서 허공과 법신이 다른 모양이 아니며,(모양이라고 하니 모양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다름이 없다는 의미이다.)

부처와 중생이 다른 모양이 아니며,

생사와 열반이 다른 모양이 아니며,

번뇌와 깨달음이 다른 모양이 아니니,

일체의 모양을 떠나면 바로 부처이다.


凡夫取境 道人取心 心境雙忘 乃是眞法 忘境猶易 忘心至難 人不敢忘心 恐落空無撈摸處 不知空本無空 唯一眞法界耳


범부는 경계를 취하고 도인은 마음을 취하나니

마음과 경계를 동시에 잊어버리면

곧 진실한 법이다.


경계를 잊어버리는 것은 오히려 쉬우나

마음을 잊기는 참으로 어렵다.

사람들은 감히 마음을 잊어버리려 하지 않는 것은

허공중에 떨어져서 잡고 기댈 곳이 없을까 두려워서이며

허공이 본래 공이 아니며 오직 하나의 참 법계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此靈覺性 無始已來 與虛空同壽 未曾生 未曾滅 未曾有 未曾無 未曾穢 未曾淨 未曾喧 未曾寂 未曾少 未曾老 無方所 無內外 無數量 無形相 無色像 無音聲 不可覓 不可求 不可以智慧識 不可以言語取 不可以境物會 不可以功用到 諸佛菩薩與一切蠢動含靈 同此大涅槃性 性卽是心 心卽是佛 佛卽是法


이 영묘한 깨달음의 성품은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허공과 더불어 같은 나이였다.

일찍이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며

더러운 것도 아니요 깨끗하지도 않으며

시끄러운 것도 아니요 고요한 것도 아니며

젊지도 않고 늙지도 않으며

방향도 없고 안팎도 없으며

수량도 없고, 모양도 없고, 색깔도 없고 음성도 없어서,

볼수도 없고, 구할 수도 없으며,

지혜로써 인식할 수도 없고,

언어로써 취할 수도 없고,

바깥 세계의 물건으로도 만날 수 없고,

공이나 노력으로 이르지도 못하나,


모든 부처와 보살과 더불어 일체의 모든 중생들에게 모두 들어 있는

같은 대열반의 성품이니

성품이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법이다.


一念離眞 皆爲妄想 不可以心更求于心 不可以佛更求於佛 不可以法更求於法 故學道人直下無心 黙契而已 擬心卽差 以心傳心 此爲正見 愼勿向外逐境 認境爲心 是認賊爲子


한마음이라도 진실을 떠나면 모두가 다 망상이니,

마음으로써 또 마음을 구할 수 없고

부처로써 또 부처를 구할 수 없고

법으로써 또 법을 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단박에 무심하여 묵묵히 계합할 뿐이다.


헤아리면 차이가 나나니(생각을 움직이면, 분별하면)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면 이것이 바른 견해이다.

바깥을 향해 경계를 좇아 대상을 인식한 것으로 마음을 삼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이는 도적을 아들로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爲有貪嗔癡 卽立戒定慧 本無煩惱 焉有菩提 故祖師云 佛說一切法 爲除一切心 我無一切心 何用一切法


탐(貪)진(嗔)치(癡)가 있은 즉 계(戒)정(定)혜(慧)가 생겼으나,

본래 번뇌가 없으니 어찌 깨달음이 있으리오?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씀하시되


“부처는 일체 법을 설하여 일체의 마음을 없애셨으나,

나는 일체의 마음이 없으니 무엇으로 일체 법을 쓰리요?”


하였다.


本源淸淨佛上 更不著一物 譬如虛空 雖以無量珍寶莊嚴 終不能住 佛性同虛空 雖以無量功德智慧莊嚴 終不能住 但迷本性 轉不見耳


본래 청정한 부처에는 다시 한 물건도 두지 않는다.

비유하면

허공에 비록 한량없는 진주와 보배로 장엄한다 하더라도

마침내 머무르지 못하는 것과 같이,

부처의 성품은 허공과 동일하여

비록 한량없는 공덕과 지혜로써 장엄한다 하더라도

끝내는 머무르지 못하니

다만 본성을 미혹하여 더 더욱 보지 못할 뿐이다.


所謂心地法門 萬法皆依此心建立 遇境卽有 無境卽無 不可於淨性上轉作境解


이른바 마음자리의 법문이란

만법이 모두 이 마음에 의지하여 세워졌으므로

경계(법)를 만나면 곧 있게 되고

경계(법)가 사라지면 곧 없어지나니

청정한 마음에 더더욱 경계(법)에 대한 알음알이를 짓지 말라.


(만 법이 모두 이 마음에서 생겨났고

또 마음은 청정하여서 만물을 거울 같이 비추어 주는데

사람들은 마치 경계상의 만물이 실제로 있다고 여겨서

본래 마음을 보지 않고 경계를 좇아서 만 가지 마음을 낸다.

그래서 경계에 대해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는 알음알이를 내지 않으면

그 마음은 늘 그랬듯이 청정하고 고요한 것이다.)


所言定慧鑑用歷歷 寂寂惺惺見聞覺知 皆是境上作解 暫爲中下根人說卽得 若欲親證 皆不可作如此見解


정혜(定慧)의 밝게 비추는 작용이 역력(분명)하고 적적(고요)하고 성성(또렷)하며

보고 듣고 깨닫고 하는 것이 모두 경계 상에서 지은 알음알이이니

이는 잠시 중하근기 사람을 위해 설하면 얻는다고 하겠으나

만약 몸소 깨닫고자 한다면,

이와 같은 견해를 지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마음(성품)은 더러우니 깨끗하느니, 밝으니 어두우니, 또렷하느니 흐리느니 하는 일체의 모양이 없다. 그래서 청정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정과 혜가 밝게 비추는 작용이 분명하니 고요하니 또렷하니 하는 이런 견해를 내는 것은

깨달음이 무엇인지, 본마음이 무엇인지 모르고

성문들과 같이 소리로 듣고 머리로 헤아려서 아는 것이므로 알음알이라고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깨달음을 얻으려 하면서 이러한 견해를 낸다면

결국, 삿된 마구니 굴로 다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盡是境法有沒處 沒於有地 但於一切法不作有無見 卽見法也


이는 모두 객관세계(경계)의 법으로 함정이 있으며

빠짐에 그 자리가 있으니(미혹할 근거들이 있다는 뜻)

다만,

일체 법에 있다 없다는 견해만 짓지 않으면 곧 법을 볼 것이다.


(위와 같은 견해를 내는 것은 모두 대상이 있다는 생각에서 일어나는 법이기 때문에

함정에 빠진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함정이라는 것이 사실 알음알이로 지어내는 것이 많아서

늘 있다 없다. 청정하다, 더럽다, 등등의 모양을 짓는다.

모양을 짓는다는 것이 바로 대상을 두고 하는 견해이다.

그러므로 빠짐에 그 자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한 생각이라도 벗어난 것은 모두 망상이요 함정이니

팔만사천 대법만큼이나 많다.

오직, 있다 없다는 견해에서 벗어나기만 바랄뿐이다.)



출처 http://beinno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