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불교/전심법요(傳心法要)

7. 법은 생겨남이 없다

slowdream 2007. 9. 9. 23:00
 

법은 생겨남이 없다.(無生)



十月八日 師謂休曰 言化城者 二乘及十地等覺妙覺 皆是權立接引之敎 並爲化城 言寶所者 乃眞心本佛自性之寶 此寶不屬情量 不可建立 無佛無衆生 無能無所 何處有城 若問此旣是化城 何處爲寶所 寶所不可指 指卽有方所 非眞寶所也 故云在近而已 不可定量言之 但當體會契之卽是


10월 8일

대사께서 배휴에게 말했다.


“화성(化城)이라는 것은 이승(二乘)과 *십지(十地)ㆍ등각ㆍ묘각 등이다.

모두 중생을 이끌기 위한 가르침으로 방편을 세운 것이다.

그래서 성곽으로 만들었다고 한다.(化成)

보배가 있는 곳이란 참된 마음의 본래부처이며 자기 성품의 보배이다.

이 보배는 사량 분별에 속하지 않으며 만들어 세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고 주관도 없고 객관도 없다면

어느 곳에 성곽(방편)이 있겠느냐?

만약에 묻기를‘이미 성곽으로 만들었다면 어느 곳에 보배가 있겠느냐?’한다면

보배가 있는 곳을 가리킬 수가 없다.

가리키면 곧 방향과 장소가 있는 것이 되니 참 보배가 있는 곳이 아니다.

그래서 경에서 말하기를 ‘가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것을 (이런 것이다 하고)정하고 (어디에 있다 하고)헤아려 말할 수 없는 것이니

오직 그 자체에 계합하면 곧 되는 것이다.


(주관이 없고 객관이 없다는 것은 주관과 객관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에 의해 객관이 있으므로 주관이 사라지면 객관도 사라진다.

그래서 주관과 객관이 없다는 것은 일체가 그것이라는 말이다.)


(일체가 다 깨달음인데(참 보배) 방향과 장소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니 그것을 어디에 있는가? 하고 묻는 자체가 어긋난 것이다.

이는 중생심이 부처라고 하듯이

우리가 늘 쓰고 있는 그 마음이 바로 참 마음이요. 그것이 본래부처인데

스스로 미혹하고 믿지 못하여 분별하고 그것을 찾으려 닦고 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그들을 이끌기 위해서 방편을 지은 것을 성곽이라 말하고 있지만,

사실 성곽(방편)이라는 것 자체가 없다.

성곽(방편)이 없다는 것은 일체가 그것이어서 방편도 사실 허깨비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다시 ‘이미 성곽으로 만들었다면 보배가 어디 있는가? 하면서

방편 속에서 찾으려고 묻는다면

이미 내 것을 다시 내 것으로 만들려 하고

허공이 다시 허공이 되려고 하고

부처가 부처를 찾는 것과 같은 것이다.)


言闡提者 信不具也 一切六道衆生 乃至二乘 不信有佛果 皆謂之斷善根闡提 菩薩者 深信有佛法 不見有大乘小乘 佛與衆生 同一法性 乃謂之善根闡提


천제(闡提)는 믿음이 없는 것이다.

모든 육도속의 중생들에서부터 이승의 무리까지 이르러

불과가 있음을 믿지 못하는 것이니

모두 선근이 끊어진 천제라 이르는 것이다.


보살은 부처님의 법을 깊이 믿어서 대승과 소승의 차별을 보지 않으며

부처와 중생이 같은 법의 성품을 지닌 것으로 본다.

그래서 선근이 있는 천제라고 한다.


大抵因聲敎而悟者 謂之聲聞 觀因緣而悟者 謂之緣覺 若不向自心中悟 雖至成佛 亦謂之聲聞佛


무릇 소리를 통해서 깨달은 자는 성문이라 하고

인연을 관하여 깨달은 자는 연각이라 하니,

만약 스스로의 마음 가운데서 깨닫지 못하면

비록 부처를 이룸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또한 성문불이라 이른다.


學道人多於敎法上悟 不於心法上悟 雖歷劫修行 終不是本佛 若不於心悟 乃至於敎法上悟 卽輕心重敎 遂成逐塊 忘於本心故 但契本心 不用求法 心卽法也


도를 배우는 사람들 중에 가르침의 법(敎法)으로 깨달은 사람은 많으나

심법(心法)으로 깨달은 사람은 없으니

비록 수많은 겁의 세월을 닦고 행한다 하더라도

끝내는 본래부처가 되지 못한다.

만약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고 가르침의 법으로 이른 자는

마음은 가볍게 여기고 가르침은 중(重)히 여겨

마침내 흙덩이를 쫓아 이루는 격이 되어 본심을 잊어버리게 된다.


오직 본심에 계합할 뿐이니 법을 구하려 힘쓰지 마라

마음만이 곧 법이다.


(본래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분별하지 않으면 그 마음이 바로 본래마음이다.

이렇게 말하면 또

‘그럼 제가 좋아하는 것을 마음대로 해 놓고 분별하지 마라면 그게 옳은 말인가?’

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멋대로 하는 것은 분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동으로 직접 옮긴 것이니 집착까지 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모든 것이 분별에서 기인함을 알고

어떻든 분별을 그치는 방법은

자신이 잘했던 못했던 그 자리에서 바로 분별을 그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단박에 마음과 계합하는 방법이다.)


凡人多爲境礙心 事礙理 常欲逃境以安心 屛事以存理 不知乃是心礙境 理礙事 但令心空 境自空∘但令理寂 事自寂∘勿倒用心也∘


보통사람들은 경계가 마음을 가로막고 세상일(事)이 이치를 가로막는 줄 알아

늘 경계에서 도피하여 마음을 편하게 하려하고

세상일을 막아 도리만 보존하려 하나,

마음이 경계를 막고 도리가(도리에 매인 마음) 세상일을 가로막는 줄 모른다.

다만 마음을 비우면 경계 또한 스스로 비어지고,

도리를 고요하게 하면 세상일 역시 고요해지니,

마음을 거꾸로 쓰지 말라.


(사람들은 세상의 일이 나쁜 일이 있고 좋은 일이 있는 줄 알아서

특히 수행하는 사람들은 이것은 하면 안 된다는 등 피해가려고 한다.

물론 자신이 좋아서 하는 것이면 괜찮지만, 그것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면서 그것이 자신의 마음을 해칠까 두려워한다.

그러나,

정작 그것을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분별하는 마음인줄 모른다.

그래서 마음이 경계를 막는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무념이 되라고 하니까

무념(理)이 생각이 없다는 표현이니까,

생각(事)만 자꾸 없애려 한다.

그러나 생각은 자연스러운 것...

무념에 대한 잘못된 그 한 생각이

그냥 놔두면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사라지는 생각을 자꾸 번잡케 한다.

그리고,

자신이 배운 도리에만 집착하면

자신이 세상을 이리저리 재단하고 분별하고 있음을 모르고

세상일이 이치에 어긋났다고 투덜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도리(理)가 세상일(事)을 막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心과 理는 본래마음과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분별하는 마음과 방편적 이치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마음을 거꾸로 쓰지 마라는 것은

중생도 부처도, 번뇌도 깨달음도 주체도 객체도 옳음도 그름도...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어서 모두가 하나인데

그것이 바로 본마음이요 진리인데

마치 분별하는 생각으로 옳은 것을 가려낼 것 같은 마음과

방편에 집착하여 마치 그곳에 무엇이 있는 양 미혹하여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세상을 자꾸 흐리지 마라는 것이다.


달마어록에 보면,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에게 맡기지 않고 사물에 맡기기 때문에

취함과 버림이 없으며, 거스름과 순응함도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사물에 맡기지 않고

자신에게 맡기기 때문에 취함과 버림이 있으며, 거스름과 순응함이 있다.

만약 마음을 열고 사물에 맡길 수만 있다면 이것이 곧 이행(易行)이며,

그것에 저항하여 사물을 변화시키려 함이 곧 난행(難行)이다.

사물이 오면 오는 대로 그에 맡겨 거스르지 말며,

떠나가면 떠나가는 대로 내어버려 두어 좇지 말라.

이를 두고 도(道)를 행한다고 한다."


라는 말이 있는데 너무나 똑같은 말이 아닌가?


달마어록에 사물이라는 것은 바깥 사물도 사물이지만,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정 역시 사물이다.

특히 우리가 싫어하고 내 치고 싶은 것들...

불안이나 게으름, 외로움, 화(분노), 미움, 짜증 등등도 사물인 것이다.

그 사물에 맡기면 그냥 제가 살다가 간다.

그리고 그것을 간섭하지 않으면 점점 순화되어

이러한 싫은 모습들이 거의 사라짐을 알 수 있다.


이 대목은 수행하는 사람들이 수행에서 많이 착각하는 것을 이야기한 것으로

비록 짧은 대목이지만 상당히 중요한 대목이다.)


凡人多不肯空心 恐落於空 不知自心本空∘愚人除事不除心 智者除心不除事∘菩薩心如虛空 一切俱捨∘所作福德 皆不貪著


보통 사람들은 마음을 비우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공에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것은

스스로의 마음이 원래 텅 비어 있음을 알지 못한 까닭이다.


(실제로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텅 비어 있다.

우리의 마음을 보라, 무슨 색깔이나 형상이나 내용이 있는가?

우리가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대상(여기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도 포함됨)과 인연이 되었을 때에

그 인연의 반연으로 어떤 형상을 짓는 것이 마음이 아닌가?

즉, 인연에 따라 내 마음이 변하니 그것이 어찌 내 마음이라 할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인연에 따라 변하여 나타난다는 것은

마음이 비어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인연에 따라 변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참 마음은 텅 빈 거울과 같다.)


어리석은 사람은 현상은 없애나 마음은 없애지 않고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은 없애나 현상을 없애지 않는다.


보살은 마음이 허공과 같아서 일체의 것을 버리고

스스로 지은 바 복덕마저도 탐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然捨有三等∘內外身心 一切俱捨 猶如虛空 無所取著 然後隨方應物 能所皆忘 是爲大捨若一邊行道布德 一邊旋捨 無希望心 是爲中捨 若廣修衆善 有所希望 聞法知空 遂乃不著 是爲小捨


버리는 것에는 세 가지가 있다.


안팎의 몸과 마음의 일체 모든 것을 버림에

마치 허공과 같아 취하고 집착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

그런 연후에 방향을 따라 사물에 응하여

너와 나를 다 잊어버리는 것이 크게 버리는 것이고,


만약 한편으로는 도를 행하여 덕을 베풀면서도

한편으로는 버려서 바라는 마음이 없는 것이 중간의 버림이며.


널리 닦고 선을 행하여 희망하는 바가 있었으나

법을 듣고 공함을 알아서 집착하지 않음이 적게 버리는 것이다.


大捨如火燭在前 更無迷悟 中捨如火燭在傍 或明或暗 小捨如火燭在後 不見坑阱 故菩薩心如虛空 一切俱捨


크게 버림은 밝은 등불 바로 앞에 있는 것과 같아서

다시 미혹과 깨달음이 없으며,

중간의 버림은 등불 옆에 있는 것과 같아서

혹은 밝고 혹은 어두우며,

적게 버림은 등불 위에 있는 것과 같아서

구덩이나 함정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보살의 마음은 허공과 같으며 일체의 모든 것을 버린다.


過去心不可得 是過去捨 現在心不可得 是現在捨 未心不可得 是未來捨 所謂三世俱捨


과거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과거를 버린 것이요,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현재를 버린 것이요,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미래를 버린 것이니

이를 일러 삼세를 다 버린 것이라고 한다.


自如來付法迦葉已來 以心印心 心心不異 印著空 卽印不成文 印著物 卽印不成法 故以心印心 心心不異 能印所印 俱難契會 故得者少∘然心卽無心 得卽無得∘


여래께서 법을 부촉한 가섭 이래로

마음으로써 마음에 인가하니 마음과 마음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허공에 착하여 인가를 하면 현상을 부정함을 인정하게 되고(공에 빠지고)

사물에 착하여 인가를 하면 법을 부정함을 인정하게 된다.(색에 빠지고)

그러므로 마음으로써 마음에 인가를 하는 것이니,

마음과 마음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인가하는 자와 인가받는 자가 서로 만나 계합하기가 어려우므로 얻는 자는 적다.

그러나 (알고 나면)마음이라는 것이 사실 곧 마음이랄 게 없는 것이니

얻었다 하는 것도 사실 얻었다 할 것도 없는 것이다.


佛有三身 法身說自性虛通法 報身說一切淸淨法 化身說六度萬行法∘法身說法 不可以言語音聲形相文字而求 無所說 無所證 自性虛通而已∘故曰 無法可說 是名說法∘報身化身 皆隨機感現 所說法亦隨事應根 以爲攝化 皆非眞法∘故曰 報化非眞佛 亦非說法者∘


부처에게는 세 가지 몸이 있는데

법신은 스스로의 성품이 허통한 법을 말하고,

보신은 일체에 청정한 법을 말하고,

화신은 육도를 만행하는 법을 말한다.


법신의 설법은 언어와 음성과 형상과 문자로서 구할 수가 없다.

설할 것도 없고 증득할 것도 없으니 스스로의 성품이 허통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설할 수 있는 법이 없으니 이를 설법이라 이름 한다.’

고 하였다.


보신과 화신은 모두 근기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이어서

설할 법이 있고 또 현상에 따르고 근기에 감응하여 포섭하고 교화하나,

모두가 진실한 법이 아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보신과 화신은 참 부처가 아니고 또한 설법도 아니다.’

라고 하였다.


所言同是一精明 分爲六和合 一精明者一心也 六和合者六根也∘此六根各與塵合 眼與色合 耳與聲合 鼻與香合 舌與味合 身與觸合 意與法合 中間生六識 爲十八界∘若了十八界無所有 束六和合爲一精明∘一精明者卽心也∘學道人皆知此 但不能免作一精明六和合解 遂被法縛 不契本心∘


동일한 일정명(一精明) 나뉘어 여섯 가지로 화합하였다고 하는데

일정명은 일심이다.

여섯 가지로 화합한 것은 육근이다.

이 육근이 각각의 진(경계, 육진)과 화합한다.

눈은 모양과 색과 합하고,

귀는 소리에 합하고,

코는 냄새에 합하고,

혀는 맛에 합하고,

몸은 접촉하는 것에 합하고,

뜻은 법에 합한다.


이 합하는 가운데 여섯 가지 식(육식)이 생기는데,

육근과 육진과 육식을 합하여 18계라고 한다.

만약 18계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만 한다면

육근을 묶어서 일정명이 되며. 일정명은 곧 마음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모두 이것을 알면서도

일정명이 육근으로 흩어져 나가는 것을 능히 면하지 못하고

법의 속박을 따르고 본마음과 계합하지 못한다.


如來現世 欲說一乘眞法 則衆生不信 興謗沒於苦海∘若都不說 則墮慳貪∘不爲衆生溥捨妙道∘遂設方便 說有三乘∘乘有大小 得有淺深 皆非本法∘故云 唯有一乘道 餘二則非眞∘然終未能顯一心法 故召迦葉同法座 別付一心離言說法∘此一枝法令別行∘若能契悟者 便至佛地矣∘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신 것은

일승(一乘 :마음 법)의 바른 법을 설하시고자 한 것이나,

중생들이 믿지 못하고 비방하여 고통의 바다에 빠져 버리고,

또 만약 설법하지 않으면 곧 인색하여 탐욕에 빠지니

중생을 널리 위하는 것이 아니어서

묘한 도리를 버리고 방편을 따라 설하시니 삼승(三乘)이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대승과 소승이 있게 되고 얻음에도 깊고 얕음이 있게 되었으니

모두 근본법이 아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오직 일승의 도가 있을 뿐이요 나머지 이승은 진리가 아니다.’

고 하셨으나 끝내 일심법을 드러내지 못하셨다.

그리하여 가섭을 불러 같은 법좌에서 따로 일심을 부촉하셨으니

이는 언설을 떠난 설법인 것이다.


이 한 가지 법(일심 법)이 따로 흘러오는데

만약 능히 계합하여 깨달음을 얻는 자는 곧 바로 부처님 지위에 이르느니라.



출처 http://beinno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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