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서 작용하는 이
대장부가 또 무엇을 의심하는가? 눈앞에서 작용하는 이가 다시 또 누구인가? 잡히는 대로 쓰며 이름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심오한 뜻이다. 이와같이 볼 수 있다면 싫어할 것이 없는 도리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心隨萬境轉 轉處實能幽
마음은 만 가지 경계를 따라 흘러가지만
흘러가는 그곳이 참으로 그윽하여라
隨流認得性 無喜亦無憂
마음이 흘러가는 그곳을 따라 성품을 깨달으니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도다
옷을 입어보이면
내가 곧 몇 가지 옷을 입어 보이면 학인들은 알음알이를 내어 한결같이 나의 말 속에 끌려들어오고 마니 슬픈 일이다.
그대들은 옷을 잘못 알지 말라. 옷은 제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 사람이 능히 옷을 입을 수 있다. 청정한 옷이 있고, 생사가 없는 옷이 있으며, 보리의 옷과 열반의 옷이 있으며, 조사의 옷과 부처의 옷도 있다. 다만 소리와 명칭과 문구 따위로만 있을 뿐 모든 것은 옷에 따라 변화하는 것들이다. 배꼽 아래 단전으로부터 울려나와서 이빨이 딱딱 부딪쳐 그 글귀와 의미를 이루는 것이니, 이것은 분명히 환화임을 알아야 한다.
◎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는 그 사람은 옷에 관계없이 늘 그 사람이며 차별 없는 참사람이다. 청정이니, 생사가 없느니, 보리니, 열반이니, 조사니, 부처니 하는 명칭을 일컫는 소리는 모두 옷에 불과하다. 그 소리들은 사람이 소리를 질러서 나오는 음성이다. 먼 하늘가에 메아리 되어 흩어지고 만다.
불을 아무리 말해도 입은 타지 않는다. 아무리 조사와 부처를 말하더라도 말을 하는 즉시 흩어지고 만다. 그보다 천만 배 수승한 말을 하더라도 역시 마찬가지다. 허망 그 자체다. 환영이다. 실체가 없는 환상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있는가? 있는 것은 무엇인가? 과연 있는 것은 있는가? 무위진인을 말하고 있으나 그 역시 옷이다. 먼 하늘가로 흩어지고 마는 메아리일 뿐이다. 어떤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잠깐 존재할 뿐이다. 그 역시 환영이요, 환상일 뿐이다. 공이다. 원인과 조건이 효과가 있는 동안만 잠깐 있는 듯하다가 공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본래 공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무위진인도 연기며 공이다. 공이며 연기다. 이것이 모든 존재의 법칙인 중도의 원리다.
출처 : <임제록 강설>(무비스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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