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경전/중아함경

88. 불교수행자가 얻는 과보

slowdream 2009. 6. 19. 09:31

88. 불교수행자가 얻는 과보


부처님이 나열기성 암바라 동산에 계실 때의 일이다. 그 무렵 아사세는 부왕 파세나디를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는데 죄의식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느 보름 날 밤, 아사세는 불편한 심기를 달래기 위해 주변사람들에게 '오늘처럼 달 밝은 밤에는 무엇을 해야 마음이 편안해질까'를 물었다.

사람들은 제각각 '목욕을 한 뒤 미녀들과 어울려 놀아 보라.' '군사를 이끌고 국경의 반란을 진압한 뒤 돌아와 연회를 하자.' '산책을 나가 천하의 순역(順逆)을 살피라.' '여섯 명의 유명한 바라문(六師外道)를 찾아가 얘기를 나누어 보라.'고 했다.

이때 수명이라는 젊은이가 나서서 '부처님을 찾아 뵈라'고 했다. 수명의 권고대로 암바라 동산으로 가자 그곳은 수많은 비구들이 있다고 믿기에는 너무나 조용했다. 아사세는 수명이 비구들과 짜고 자기를 함정에 빠뜨리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수명은 '비구들이 한정(閑靜)을 즐기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하고서야 아사세를 부처님 앞에 앉힐 수 있었다.

"여쭈어볼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직업으로 생활하면서 인생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열심히 살아온 대가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문들은 수행을 하면 현재에 어떤 과보를 받는지요?"
"왕은 다른 바라문들에게도 그 질문을 해본 적이 있는가?"

"푸라나 카사파는 선악의 행위와 그 보응을 부정하는 도덕부정론자였으며, 막칼라 코살라는 인간의 의지에 의한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운명론자였습니다. 파쿠다 카차야나는 인간의 의지작용을 인정하지 않는 유물론자이고, 아지타 케사캄발린은 내세는 없고 현세가 인생의 전부라고 주장하는 유물론자이자 쾌락주의자였습니다. 산자야 벨라티푸타는 선악이나 내세에 대해 확정적인 대답을 기피하는 회의론자였으며 니간타 나타푸타는 생명을 영혼과 비영혼으로 구분하는 자이나교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질문에 만족할만한 대답을 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부처님을 찾아 뵙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갖가지 직업에 충실하면 과보가 있는 것처럼 수행자가 도를 닦으면 현재에 어떤 과보를 받는지요?"

"하나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이요, 또 하나는 누진지증(漏盡智證)을 얻는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정근하고 전념하여 방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사세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예배하고 말했다.

"저는 어리석고 어두워서 부왕을 해쳤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원컨대 저의 참회를 받아주소서."
"그대는 스스로 허물을 뉘우쳤다. 이제 무서운 재앙에서 빠져 나왔다. 앞으로는 편안할 것이다."
부처님을 친견하고 궁으로 돌아온 아사세는 많은 음식을 장만하여 부처님과 제자들을 초청해 공양을 올렸다. 그는 부처님에게 예배하고 발 밑에 앉아 설법을 들었으며, 삼보에 귀의하고 우바새가 되기를 맹세했다.

-장아함 17권 27경 <사문과경(沙門果經)>


이 경전은 불교수행의 최후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한마디로 대답해주고 있다. 즉 모든 수행자가 최후로 증득하고자 하는 과보는 누진지(漏盡智)에 있다는 것이다. 누진지란 한마디로 '모든 번뇌가 다 사라진 지혜'를 말한다. 불교에서는 유루(有漏)지혜와 무루(無漏)지혜란 말을 자주 쓰는데 이때 누(漏)는 곧 번뇌를 의미한다. 유류지혜란 무엇인가 아직 불완전한 지혜를 말하고 무루지혜는 완전한 지혜를 말한다.

그러면 모든 번뇌가 사라진 완전한 지혜란 어떤 경지를 의미하는 것인가.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집착과 욕구가 사라진 상태, 또는 그런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지혜를 말한다. 우리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욕구와 집착에 빠져 산다. 자기자신에 대한 집착, 내 것이라는 집착은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소유해도 끝나지 않는다. 99개를 가졌으면 다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일텐데 1개를 더 갖지 못해 안달을 하는 것이 우리들이다.

이렇게 해서는 영원토록 편안함을 얻을 수 없다. 진정한 편안함을 채우는 것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에서 얻어진다. 왕관과 재산을 얻고자 아버지까지 죽여도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마음의 편안함은 얻지 못한다. 진정한 편안함은 미워하는 사람도 껴안고, 남을 위해 나누는 데서 얻어진다. 우리가 아직도 고통에서 헤매는 까닭은 다른데 있지 않다. 아사세왕처럼 아직도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행복해지기를 바란다면 방법은 하나 뿐이다.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출가사문들처럼 유루의 지혜와 복이 아니라 무루의 지혜와 복을 얻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출처 홍사성의 불교사랑  http://cafe.daum.net/hongsas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