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무상(無常)(2)
연기의 이법과 무상의 개념
그것은 다름 아니다. 무상이란 연기의 이법에서 직접 도출해 나온 개념인 것이다. 한 경*(남전 상응부경전(22ㆍ18) 因<1>. 한역 잡아함경(1.11) 因)은 무상에 대해 부처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고 있다.
비구들아, 색은 무상이다. 색을 생기게 하는 원인도, 연(조건)도 무상이다. 비구들아, 무상한 것에 의해 생긴 색이 어찌 항상할 수 있겠는가.
비구들아, 수는 무상이다. 수를 생기게 하는 원인도 조건도 무상이다.
비구들아, 상은 무상이다.… 행은 무상이다.… 식은 무상이다. 식을 생기게 하는 원인도 조건도 무상이다. 비구들아 무상한 것에 의해 생긴 식이 어찌 항상 할 수 있겠는가.
비구들아, 나의 가르침을 들은 성스러운 제자들은 이와 같이 보고 그것을 싫어해 떠난다. 그렇게 되면 탐욕을 버리게 된다. 탐욕을 버리게 되면 해탈을 얻게 된다. 해탈을 얻게 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기고, 지혜가 생기게 되면 ‘나의 미혹한 삶은 이미 끝났다. 청정행은 이제 성취되었다. 더 이상 미혹의 삶을 되풀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부처님은 무상의 개념을 신기하게도 연기의 이법과 결부시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부처님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색은 무상이다. 수ㆍ상ㆍ행ㆍ식은 무상이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은 그 근거로 그것(色ㆍ受 ㆍ想ㆍ 行ㆍ識)을 생기게 하는 원인(因)도 조건(緣)도 모두 무상이기 때문임을 들고 있다. 아니, 무상한 인과 연으로 생긴 그것(색ㆍ수ㆍ상ㆍ행ㆍ식)이 어떻게 항상할 수 있겠느냐고 오히려 반문하고 있다. 이미 말했듯이 연기란 하나의 존재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만법 즉 모든 존재를 연, 즉 조건지어져 있음에 생기는 것이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그러한 것은 연이 멸하면 없어지는 것이다.
연기론적 존재론은 당연히 유동적인 적을 그 특징으로 한다. 모든 것이 ‘옮겨간다’는 것이나 만물은 ‘유전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부처님은 그것을 ‘무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연기의 이법과 무상의 개념의 표리일체의 것으로, 그 사이에는 전혀 설명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그런 뜻에서 앞에서 말한 ‘색은 무상이다’라는 것은 연기의 이법에 따라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의 제1명제라 해도 좋다.
이 무상이라는 제1명제는 다른 경전에서도 자주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전혀 설명이 가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지금 《잡아함경》(1ㆍ11)에서는 연기의 이법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경의 서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근본50경
남전대장경의《상응부경전》제3권과 제4권 머리에 각각 ‘근본50경(Mūla, paññ asa)'이라는 경전군(각각50경이다)이 있다. 경전의 편집자는 그 경전들을 무슨 까닭에 ’근본50경‘이라고 부르고 있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있지 않다. 그러나 유의해서 읽어보면 저절로 어째서 그 경전들을 ’근본50경‘이라고 부르는가를 어렴풋이 알게된다. 먼저 그 경전들에서의 대고중(對告衆), 즉 부처님이 설법하는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불과 몇 가지 예를 제외하고 모두가 출가자(비구)라는 점을 알게 된다. 여기에서 부처님이 설법을 주제로 삼고 있는 것은 무상의 문제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설법들은 어느 정도 정형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즉 거기에는 부처님이 비구들에게 했던 설법의 가장 기본적인 유형이 집록되어 있다. 따라서 그런 경전들이라면 ’근본50경‘이라고 불릴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이다.
이러한 경전들 가운데서 우선 가장 기본적이고 또한 고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 두세 가지 경전을 일단 읽어보기로 한다. 이 경전들은 매우 소박하고 정형적인데 그런 소박함 속에서 교리의 원초적인 모습이 발견되고 있다. 그 중 한 경*(남전 상응부경전(22ㆍ12) 無常. 한역 잡아함경(1ㆍ1) 無常)은 다름과 같이 기록 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색(육체)은 무상이다.
비구들이여, 나의 가르침을 성스러운 제자들은 이렇게 보고 색을 염리한다. 색을 염리하게 되면 탐욕을 떠난다. 탐욕을 떠나게 되면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기고 ‘나의 미혹한 삶은 이미 끝났다. 청정한 행은 이미 성취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미 다했다. 더 이상의 미혹한 삶을 되풀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깨달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수(감각)는 무상이다…
비구들이여, 상(표상)은 무상이다…
비구들이여, 행(의지)은 무상이다…
비구들이여, 식(의식)는 무상이다…
비구들이여, 나의 가르침을 들은 성스러운 제자들은 이렇게 보고 색(受ㆍ想ㆍ行ㆍ識)을 염리한다. 색을 염리하게 되면 탐욕을 떠난다(離貪). 탐욕을 떠나게 되면 해탈한다. 해탈을 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기고 ‘나의 미혹한 삶은 이미 끝났다. 청정행은 이미 성취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미 다했다. 더 이상의 미혹한 삶을 되풀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깨달은 것이다.
이것은 필경 ‘색은 무상’이라고 말했던 많은 경전 가운데 가장 간략하고 단순한 형식의 서술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에 비해 다음에 소개하는 경*(남전 상응부경전(22ㆍ15) 無常<1>. 한역 잡아함경(1ㆍ9)厭離)은 이보다 약간 장문이고 무상 외에 다시 고, 그리고 무아의 개념도 언급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색은 무상이다. 무상인 것은 괴로움(苦)이다. 괴로움인 것은 무아이다. 무아인 것은 나의 소유*(나의 소유:mine, mana 我所. 또한 我所有라고 한역)가 아니며 내*(我:I am, asmi 또는 我我라고 번역)가 아니며 또한 나의 본체*(나의 본체:my soul, my essence, meattā 나의 본질. 我體라고 한역)도 아니다. 진정 이와 같은 올바른 지혜로 보는 것도 좋다.
비구들이여, 나의 가르침을 들은 성스러움 제자들은 이렇게 보고 색(受ㆍ想ㆍ行ㆍ識)을 염리한다. 색을 염리하게 되면 탐욕을 떠난다(離貪). 탐욕을 떠나게 되면 해탈한다. 해탈을 하면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기고 ‘나의 미혹한 삶은 이미 끝났다. 청정행은 이미 성취되었다. 해야 할 일은 이미 다했다. 더 이상의 미혹한 삶을 되풀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깨달은 것이다.
여기에서 부처님은 먼저 무상의 문제로부터 출발하고 있지만 다시 그것을 괴로움의 문제로 결부시키고 또 무아의 문제와 결부시키고 있다. 여기에는 뒷날 삼법인(三法印)으로 정리되는 무상ㆍ고ㆍ무아라는 현실인식이 보인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염리ㆍ이탐ㆍ해탈이라는 형식의 실천방법이 뒤따르고 있다.
이와 같은 유형의 설법은 앞에서 말한 ‘근본50경’을 비롯해서 부처님의 설법 형식으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형식이다. 이같은 유형은 아마 부처님이 비구를 지도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부처님은 색(受ㆍ想ㆍ行ㆍ識)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며 무아한 것을 일깨워 그것을 염리하고 이탐하게 하여 마침내 해탈을 성취하도록 하는 데 설법의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육처에 대해
한 경*(남전 상응부경전(35ㆍ1)無常<1> 內. 한역 잡아함경(8ㆍ9~10) 厭離ㆍ苦ㆍ 空ㆍ無我)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눈(眼)은 무상이다. 무상인 것은 모두 고다. 모든 고인것은 무아이다. 그리고 모든 무아인 것은 ‘이것은 나의 소유가 아니다. 이는 내가 아니다. 이는 나의 본체가 아니다’라고 그렇게 바른 지혜로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또한 귀(耳)는 무상이다…
비구들이여, 또한 코(鼻)는 무상이다…
비구들이여, 또한 혀(舌)는 무상이다…
비구들이여, 또한 몸(身)은 무상이다…
비구들이여, 또한 의식(意)은 무상이다. 무상은 것은 모두 고다. 모든 고인 것은 무아이다. 그리고 모든 무아인 것은 ‘이것은 나의 소유가 아니다. 이는 내가 아니다. 이는 나의 본체가 아니다’라고 그렇게 바른 지혜로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그렇게 보고 나의 가르침을 들은 성스러운 제자들은 눈에 대해 그것을 염리하면 탐욕에서 떠난다. 탐욕을 떠나면 해탄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자각이 생기고 ‘나의 미혹한 삶은 이미 끝났다. 청정한 삶은 이미 성취되었다. 할 일은 모두 끝났다. 이제 더 이상 미혹한 삶을 되풀이하는 법(윤회)은 없으리라’이렇게 깨닫는 것이다.
이 경은 상응부경전 35의 ‘육처상응(六處相應)’이라는 이름에 붙은 경전군 안에 있다. 이 경전군은 그 속에 2백 개가 넘는 많은 경전을 수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경전군 맨앞에 ‘근본 50경’으로 불리는 경전들이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앞에 있는 것이 바로 이 경이다.
여기서 육처상응의 육처(saḷāyatana)란 육입(六入) 또는 육근(六根)이라고도 한다. 즉 눈(眼)ㆍ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ㆍ의식(意) 이라는 인간이 가진 여섯 개의 감각기관을 말한다. 이 감각기관은 각기 물체(色)ㆍ소리(聲)ㆍ향기(香)ㆍ맛(味)ㆍ감촉(觸)ㆍ의식(法)이라는 여섯 가지 대상 즉 육경(六境)에 서로 연관되어 거기에서 인식이 성립된다. 부처님은 이 경에서 먼저 육는 즉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예로 들면서 그 하나하나에 대해 ‘그것은 무상이다. 무상인 것은 모두 고다. 모든 고인 것은 무아이다…’라는 식으로 무상→고→무아라는 나중에 삼법인의 정형이 되는 설법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의식 등의 육근을 말하자면 인간의 내적 감각기관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이것을 ‘내육입(內六入)’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 경의 제목이 ‘무상<1>내’로 되어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이와는 반대로 ‘무상<2>외’라고 제목이 붙은 경*(남전 상응부경전(35ㆍ4) 無常 <2>外. 한역 잡아함경(8ㆍ9~10) 無常ㆍ苦ㆍ空ㆍ無我)이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비구들이여, 색(물체)은 무상이다. 무상인 것은 모두 고다. 고인 것은 모두 무아이다. 그리고 무아인 것은 모두 ‘이는 나의 소유가 아니다. 이는 내가 아니다. 이는 나의 본체가 아니다’라고 그렇게 바른 지혜로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또한 소리(聲)는 무상이다…
비구들이여, 또한 향기(香)는 무상이다…
비구들이여, 또한 맛(味)은 무상이다…
비구들이여, 또한 감촉(觸)은 무상이다…
비구들이여, 또한 관념(法)은 무상이다. 무상인 것은 모두 고다. 고인것은 모두 무아이다. 무아인 것은 모두 ‘이는 나의 소유가 아니다. 이는 내가 아니다. 이는 나의 본체가 아니다’라고 그렇게 바른 지혜로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그렇게 보고 나의 가르침을 들은 성스러운 제자들은 물체에 대해 그것을 염리하고 소리에 대해 그것을 염리하며 향기에 대해 그것을 염리하고 맛에 대해 그것을 염리하며, 감촉에 대해 그것을 염리하고 관념에 대해 그것을 염리한다. 이렇게 염리하면 탐욕에서 떠난다. 탐욕에서 떠나면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자각이 생기고 ‘나의 미혹한 삶은 이미 끝났다. 청정행은 이미 성취되었다. 할 일은 모두 끝났다. 이제 더 이상 미혹한 삶을 되풀이하는 일(윤회)은 없으리라’이렇게 깨닫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육근은 육경과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거기서 우리들 인간의 인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말하는 세계란 바로 이것에 불과하다. 부처님은 앞에서 육근이 각각 무상임을 강조한 뒤 다시 여기서는 그것을 뒤집어서 그 대상이 되는 육경 대해서도 각각 무상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이 세계란 인간측에서 보아도, 또 그 대상측에서 보아도 모두가 무상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홍사성의 불교사랑 http://cafe.daum.net/hongsa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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