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연기(緣起)(2)
성스런 제자의 자세
부처님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설법한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들은 이 연기와 연생의 법을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잘 본다. 하지만 그들 또한 과거세의 일을 상기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과거세에 있었던 것일까, 없었던 것일까. 그리고 무엇 때문에 과거세에 있었던 것일까. 또 과거에는 어떠했을까. 과거세에는 어떤 상태로 있었을까’라고. 그리고 다시 미래의 일도 생각해 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무엇 때문에 내세에 있게 될까. 또 내세에는 어떻게 있게 될까. 내세에는 어떤 상태로 있게 될까’라고. 또 현세에서의 자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갈등을 가지는 일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나(我)라는 것은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일까. 나는 도대체 어떻게 있는 것일까. 도대체 이 사람들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또 그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라고.
그러나 그들은 그 이치는 모르는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그들은 다만 그대로 이 연기와 연생의 법을 올바른 지혜로써 볼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경에서 말하는 부처님 설법한 마지막 제3단락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부처님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결국 ‘나의 성스러운 제자’는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이라 할 수 있다. ‘그대들 중에는 문득, 과거세의 일이나 미래세의 일, 또는 현재의 자기 존재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다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걱정하는 것은 나의 성스러운 제자로서는 적당한 일이 아니다. 그러지 말고 다만 올바른 지혜로써 연기(緣起)와 연생(緣生)의 법을 있는 그대로 보라. 그것이 나의 거룩한 제자의 태도이다’라는 지적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지에 도달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오늘을 사는 우리는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심심미묘(甚深微妙)한 연기법
연기의 이법(理法)은 결코 이해하기 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처님 자신의 술회에서나 제자들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보리수 아래에서 부처님이 설법에 앞서 고민하였던 것도 바로 이 점이었다. 한 경*(남전 상응부경전(6ㆍ1) 勸請. 한역 증일아함경(19ㆍ1)) 은 그때의 부처님 생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고 있다.
내가 깨달은 이 법은 대단히 깊고도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다. 적정미묘(寂靜微妙)하고 사유의 세계를 초월하고 있으므로 우수한 자만이 깨달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세간의 사람들은 다만 욕망을 즐기고 욕망을 좋아하여 욕망에 날뛰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도저히 이 이치를 보기 어렵다. 이 이치한 모든 것은 상의성*(相依性:having its foundation in this ; causally connected, idappaccayatā.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의해서 맺어지는 것) 이며 연(緣;조건)이 있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또 반대로 모든 계량(計量)을 멈추고 소의(所依)를 버리게 되면 갈애는 끝나고 탐욕을 떠나 완전히 열반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이 법을 설해도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는 다만 피로해지고 지칠 뿐이다.
여기에서 부처님은 연기의 이법을 ‘대단히 깊고도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는 그다지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 이치를 터득했다고 생각해도 그것으로써 우리는 인생관이 바뀐다고 하는 감개(感慨)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직도 그 이치를 터득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한 경*(남전 상응부경전(12ㆍ60)因. 한역은 없음)에서 이 점은 명백하게 지적되고 잇다.
부처님이 구루(拘樓) 지방의 감마라는 작은 마을에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그때 늘 부처님을 따라다니던 아난다가 부처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승이시여, 이 연기의 법은 대단히 깊고 미묘한 이치라고 하는데 저로서는 아무래도 미묘하거나 불가사의한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스승이시여, 그것은 제가 보기에는 명명백백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때 부처님은 아난다의 소견을 나무라며 이렇게 말했다.
“아난다며,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 이 연기의 법은 매우 심원하고 미묘한 모양을 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법을 깨닫지 못하고, 이 법을 모르기 때문에 마치 실타래가 뒤엉키듯, 종이가 뒤덮이듯, 또는 문차(們叉)라는 풀이나 피라바(彼羅波)라는 풀처럼 나쁜 곳에서 태어나 나쁜 곳으로 가고 언제까지라고 지옥의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은 다시 그 연기의 이법을 인간존재에 대입시켜 어떻게 해서 이 고통스러운 인간존재를 탄생시키는지, 어떻게 그 고통스런 실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간곡한 비유를 섞어 설법하고 있다. 이 경에서 아난다가 연기의 이법에 대해 쉽게 생각하다가 끝내 부처님의 꾸중을 듣는 장면은 매우 흥미있다. 그러면 이 연기법이란 어떤 이유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인가. 대관절 어디가 미묘하고 어디가 난해한 것인가. 이에 관한 문제도 매우 흥미있다.
부처님에 의해 득오(得悟)된 진리(理法)를 우리는 부처님의 표현에 따라서 ‘연기(緣起)’라고 부른다. 오늘날의 철학적 용어에 해당시켜 생각해 보면 그것은 하나의 존재론임을 알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존재론이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존재일반을 논하는 학문이다. 이 용어는 17세기경 독일의 철학자 클라우베르크(Clauberg, 1622~1665)라는 학자가 처음으로 사용한 것이라 한다. 존재일반이란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희랍어 ‘onta(존재자)’이다 그리고 이같은 견해의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이론과 그의 저서 《형이상학》제6권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 탐구하는 것은 존재자의, 또 말할 것도 없이 존재자로서 있는 한에서의 여러 가지 원리와 원인이다.”
즉 존재를 다만 존재로서 논하는 것이 이 학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 부처님이 저 보리수 아래서 증득한 연기의 이법이라는 것도 또한 이같은 존재일반에 관한 원리였다. 그것을 우리는 그때 ‘만법이 분명해졌다고’ 말했고 또는 ‘부처님은 능히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깨달았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일반의 파악법, 사고법에는 예부터 여러 가지 유형이 존재하는데 대략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존재일반을 ‘만들어진 것’으로 파악하는 방법이다. 가령《구약(舊約)》에서 말하는 천지창조, 이 세상에는 존재하는 것은 사상이라든가 철학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신화적 사유 속에서 태어난 사고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사고방식이 오늘날에도 아직 하나의 인생관 또는 인생관의 바탕이 되어 인간이 살아가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기독교의 존재가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둘째는 존재일반을 ‘있는 것(有)’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방법이다. 초기의 희랍 철학자의 표현대로 하면 ‘존재자(onta)'라는 것이 그것이다. 앞서 말한 ’존재론(Ontologie)'이라는 말도 이런 사고방식에 근원하는 것이다. 결국 여기에서 존재일반이란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관찰하고 분석해서 그 시상을 원질에까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 포착방법의 전형적인 것을 우리는 옛날 희랍 철학자들과 근대 자연과학자들의 사고방식에서 볼 수 있다.
세 번째 유형은 모든 존재는 결국 ‘이동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좀 더 비유해서 말한다면 모든 것은 ‘흘러가는 것’이라는 사고법이다. ‘만물은 유전한다’고 말한 헤라클레이토스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 ‘이동하는 것’ 또는 ‘유전하는 것’이라는 것을 현상적인 측면에서 말하면 생성하고 변화하고 소멸하는 것이 된다. 초점을 이처럼 존재일반에 적용하면 이번에는 그것을 생성과 유전 속에 놓고 포착하려는 태도가 생겨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관찰의 방법을 사용하게 괴면 자연 거기에는 분석 대신 종합이 등장한다.
이것은 결국 모든 것을 관계 속에 놓고 보는 태도이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그 생성하고 유전하는 변화의 법칙을 묻는 일이 그것의 중심적 과제가 되는 것이다. 지금 부처님도 역시 존재일반을 그와 같이 ‘이동하는 것’또는 ‘흐르는 것’으로 포착하고 또한 그 변화의 법칙을 추구해서 그것을 ‘연기의 존재론’으로 내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존재론의 세 가지 유형을 선정했다고 해서 그 어느 것이 우수하고 어느 것이 뒤진다는 우열론은 삼가야 한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세 가지 유형이란 어느 것엔가 익숙해진 우리로는 그 외의 사고방식을 쉽게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존재일반을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사고방식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이동하는 것’ 또는 ‘흘러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일이 결코 쉽지않다. 그 예로 우리는 다음의 한 경*(남전 상응부경전(12ㆍ67) 葦束. 한역잡아함경(12ㆍ6) 葦)의 예를 생각할 수 있다.
어느 때인가 사리풋다(舍利弗)와 마하코티타(摩訶拘絺羅)라는 비구가 바라나시의 녹야원에 머물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무렵 마하코티타는 명상의 자리에서 일어나 사리풋타를 찾아가 정중한 인사를 한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친구 사리풋타여, 노사(老死)는 자작(自作)일까 타작(他作)일까. 또는 노사(老死)는 자작인 동시에 타작일까. 아니면 노사는 자작도 타작도 아니고 원인없이 생기는 것일까.”
여기서 ‘자작’이라거나 ‘타작’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자기가 만드는 것’ 또는 ‘남이 만드는 것’이라는 뜻이다. 즉 그는 먼저 늙음과 즉음(老死)의 문제를 예로 들면서 그것이 주가 만드는 것이냐고 물었다. 이날 사리풋다에게 질문을 한 마하코티타라는 제자는 상당히 알려진 인물이었던 듯싶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의 질문은 매우 엉뚱한 것이었다. 그래서 사리풋타는 이렇게 대답했다.
“친구여, 노사는 자작이 아니다. 또한 타작도 아니다. 그리고 노사는 자작이거나 타작인 것도 아니다. 그리고 원인없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다만 생이 있음으로 해서 노사가 있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다시 두 사람의 계속되는 문답의 내용을 노사→생→유→취→애→수→촉→육처→명색→식으로 대치해 놓고 있다. 그것은 앞서 말한 12지연기의 지절(여기서는 10지까지만 있다)로서 마하코티타는 그 하나하나에 대해 자작인가 타작인가를 묻고 사리풋타는 그것을 모조리 부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마하코티타는 전혀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 그는 다시 물었다.
“친구여, 지금 설법한 바의 의미는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해 사리풋타는 비유를 들어 설명해 나간다.
“친구여, 그러면 한 가지 비유를 들어보자. 그대는 이 비유의 뜻을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친구여, 그것은 이를테면 두 개의 갈대 묶음이 서로 기대어 서 있는 것과 같다. 바로 그것이다. 친구여 이와 마찬가지로 명색에 의해 식이 있는 것이고 식에 의해 명색이 있는 것이다. 또 명색에 의해 육처가 있는 것이고…이러한 것이 모든 고의 집적을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친구여, 만일 그 갈대 다발 중 어느 것인가를 치워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다른 하나도 쓰러질 것이다. 또 다른 하나를 치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처럼 명색이 멸하면 식이 멸하고…이와 같이 모든 고의 집적이 멸하는 것이다.”
사리풋타의 설명에 마하코티타는 찬사를 보내며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출처 홍사성의 불교사랑 http://cafe.daum.net/hongsa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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