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작의와 여실지견
니까야 경전이나 초기불교 관련 해설서, 법문 등을 대하다 보면 여리작의 如理作意 yonisomanasikara, 여실지견 如實知見 yathabhutananadassana이라는 용어를 많이 접하게 됩니다. 여실지견은 대체로 ‘있는 그대로 알고 봄’ ‘형성되는 그대로 알고 봄’으로, 여리작의는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 ‘근원에 맞는 정신활동’ 등으로 얘기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번역은 두루뭉실할 뿐 아니라 모호하기 그지 없어서 크게 와닿지 않으며, 여리작의와 여실지견의 차이가 무엇인지 판단하기도 어렵습니다. 여리작의는 한마디로 ‘연기적 사유’를 가리킵니다. 이와 달리, ‘실체적 사유’는 소유를 동력으로 하는 감각적 쾌락에의 욕망, ‘나는 있다’라는 착각을 동력으로 하는 존재적 욕망을 바탕으로 합니다.
연기적 사유는 곧, ‘이것이 있음으로써 이것(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음으로써 이것(저것)이 없다. 이것이 생성하므로써 이것(저것)이 생성하고, 이것이 소멸함으로써 이것(저것)이 소멸한다’는 연기의 정형구와 12연기로 설명됩니다. 그럼으로써 연기하는 법의 성품이 ‘무상, 고, 무아’라는 3법인이 자연스럽게 도출됩니다.
그렇다면 여실지견은 어떤 앎과 봄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리작의를 확립하고 삼매수행을 닦은 과보로 주어진 지혜가 바로 여실지견입니다. 삼매의 목적과 이익은 여실지견이라고 경전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여실지견을 성취했을 때 비로소 4성제를 깨달을 수 있다고 봅니다. 8정도의 세간적 정견을 뛰어넘은 10정도의 정지 正智가 여실지견이라 해도 무방하겠지요.
불교 수행과정을 간단하게 이해하자면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사띠, 여리작의 > 사마타, 위빠사나 > 여실지견 > 염오, 이탐, 소멸 > 해탈, 해탈지견
*여실지견은 성인 사향사과 가운데 예류도의 깨달음으로 이해하면 될 듯싶습니다. 선종의 깨달음이 이와 비견되는 듯합니다. 아라한의 궁극적 깨달음은 해탈지견이겠죠.
*염오, 이탐, 소멸 과정은 예류도 이상 성자들(예류자, 일래자, 불환자)의 심화된 사마타, 위빠사나 수행이라 봅니다.
염오. 이탐을 사마타, 소멸을 위빠사나 수행과정으로도 이해하기도 하며, 염오를 감각기관을 단속하는 사띠와 관련짓고 이어서 이탐을 사마타, 소멸을 위빠사나 수행과정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마음을 토대로 바깥 세상과 만나는 6근의 인식과 행위의 과정에 사띠로써 염오하고, 이탐.소멸은 마음의 형성과정인 takka에서 이루어지는 심층적인 수행을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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