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에서 간화선이 처음으로 수용된 것은 보조국사 지눌스님에 의해서이다.
지눌스님은 당시 수선사(修禪社, 오늘날의 송광사)에서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정혜결사(定慧結社) 운동을 전개했는데,
그 과정에서 대혜종고 스님에 의해 체계화된 간화선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도입된다.
주목할 점은 지눌스님의 간화선 수용이
대혜종고 스님이나 그 제자들의 직접적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닌
지눌스님 스스로 깨달음을 추구하던 과정에서
대혜스님 어록인 〈대혜어록〉를 접하며 얻었다는 것이다.
이는 송광사 보조국사 비문에 나온다.
지눌스님은 〈대혜어록〉을 중요하게 여기며 수행에 활용했고,
이 책의 내용을 통해 간화선을 이해하고 중요한 수행법으로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지눌스님이 간화선만을 수행법으로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에서
‘성적등지문’과 ‘원돈신해문’의 수행법도 유용하지만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며
간화문의 방법이 보다 완전한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눌스님이 ‘대혜어록’읽고 첫 도입
혜심.보우스님이 체계화.유포시켜
간화선의 본격적 수용은 진각 혜심(慧諶)스님 때의 일이다.
지눌스님의 후계자인 혜심스님은 수행자들이
‘무자화두’에 들어 공부할 때 생기는 구체적 병증에 대해 자세히 밝힌
〈구자무불성간화론(狗子無佛性看話論)〉과
우리나라 최초의 공안(公案) 모음집인 〈선문염송〉을 편집했다.
혜심스님 이후 간화선의 수행풍토는 수선사 16국사를 통해 계승됐는데
원 간섭기를 전후해 수선사의 간화선 경향과는 다른 새로운 간화선 경향이 수용됐다.
수선사 10대 사주 만항(萬恒)스님이 수용한 몽산덕이(蒙山德異) 선풍이 그것이다.
중국 강남지방에서 활약하던 몽산덕이 스님은
모든 이론적 가르침을 부정하고 오로지 ‘무자(無字)’ 화두를 참구하는 것만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무자’ 화두의 참구는 이미 대혜종고 스님 때부터 비롯됐지만
몽산덕이 스님은 이를 더욱 극단으로 밀어붙여
오로지 ‘무자’ 화두에 의한 간화선만을 유일한 선종의 수행법으로 강조했다.
염불조차도 공안화(公案化)해 화두를 들게 하는 염불화두선도 내세웠다.
또 본분종사(本分宗師)에 의한 인가도 주장했다.
수행자가 화두를 제대로 깨우쳐 온전한 깨달음을 얻었는지를 증명할 수 없기에
온전한 깨달음을 얻은 본분종사를 찾아가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화두의 참구만을 강조하는 덕이스님의 간화선 사상이 파급되면서
고려의 선종에서는 화두 참구 이외의 수행은 점차 정당성을 얻지 못했다.
자연히 승려들의 중국 유학이 유행처럼 번졌다.
간화선을 확고하게 정착한 고려말 3명의 스님인
태고 보우(普愚), 나옹 혜근(惠勤), 백운 경한(景閑) 스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중 간화선을 가장 널리 유포하고 체계화시킨 스님은 태고 보우스님이다.
원나라 석옥 청공스님으로부터 임제 의현(義玄)스님의 정맥을 이어받은 스님은
화두참구→깨침→본색종사 참문→구경결택 등으로 이어지는 간화선 체계를 확립했고
중국 임제종의 법맥을 조선불교를 통해 전수했다.
보우스님의 법맥은 청허 휴정(休靜)과 부휴 선수(善修)스님의 양대 산맥을 거쳐
휴정스님(서산대사) 문하에서 편양 언기(彦機)와 사명 유정(惟政)스님이라는 두 거장을 배출했다.
편양 언기의 문파가 번성해 환성 지안스님으로 이어졌고 이로부터
조계종의 간화선풍을 크게 진작시킨 경허 성우(惺牛)스님과 용성 진종(震鍾)스님이 나왔다.
경허스님은 이후 수월(水月) 혜월(慧月) 만공(滿空) 한암(漢岩)스님 등의 제자를 두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