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염화실의 향기

유마 김일수 / 불생불멸(不生不滅)

slowdream 2008. 10. 28. 04:07

불생불멸(不生不滅)이란

 

 

‘不生’은, 모든 생이 스스로 생겼다고 하든, 남이 생기게 했다고 하든,

스스로와 남이 생기게 했다고 하든, 그것들에는 생함이 진정 없음을 바로 알아,

생으로부터 오는 모든 논리적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마치 바람이 그물에서 벗어나듯이 벗어난다.

 

왜 그런가? ‘스스로 생한다’고 함은 마치 손가락이

스스로 손가락을 가리킨다 함과 같으니 그 주장이 결코 사실과 맞지 않은 것이고,

‘남으로부터 생한다’고 함은 감나무에 생긴 감 열매가

다른 데서 날아와 생겼다고 함이니 그 주장이 사실과 맞지 않고,

‘자타를 겸하여 공동 작업으로 생한다’고 함은 앞의 둘의 부조리를 겸하였으므로

더 볼 것도 없이 사실과 맞지 않다.

 

이것은 마치 주인 없는 소를 보고 ‘자기가 그 주인이다’하면서,

길 없는 길에 ‘이것이 태초의 길이다’ 하여 억지로 잡아끄는 것과 같아 몹시 흉한 상[모습]이라 한다.

그러므로 태초이든 중간이든 나중이든 생은 없으며, 생이 없으므로 불생인 것이다.

 

어떤 이는 有에서 생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無에서 생한다고 하는 등등,

가지가지 생의 모양을 들어 생함이 있다고 열심히 주장하지만,

어리석은 이의 계교사량(計較思量)일 뿐, 처음과 중간과 나중을 통틀어 생함은 없다.

 

‘不滅’은, 만일 생하는 것이 아니라면 멸하여 없어지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는 주장에 대하여

버럭 소리를 질러 움츠러들게 함이니, 바로 불생이므로 불멸인 것이다.

태어나지 않은 것은 늙음도 병듦도 죽음도 없으므로 불멸인 것이다.

만일 멸함이 있다면, 아이가 어른이 됨에는 아이가 멸해서 어른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아이는 없지 않으냐?

 

인연따라 일어나고 인연따라 소멸하는 이 과정을 보고 생멸을 주장한다면,

수원역을 보고 서울역이라 하는 격이니 틀림없이 가는 곳을 그르치고 말 것이다.

 

수자타야, 이 생멸의 모양은 잠든 이의 꿈과 같으니,

진실한 듯하지만 깨고 나면 없는 것을 가지고 꿈이 생했다고 하고, 꿈이 멸했다고 하는 것이다.

 

수자타야, 이 생멸의 모양은 병자가 헛것을 봄과 같다.

몸이 허약하여 헛것이 나타났다 사라졌다가 하는 가운데, 저것이 보였다 말았다 한다고 하지만,

진실로는 ‘보이는 것’이다, ‘안 보이는 것’이다 할 것이 없다.

 

수자타야, 이 생멸하는 모양은 물방개가 집으로 삼는 물거품 같은 것이니,

물거품은 진실로는 물도 아니요, 거품도 아니요, 단단한 것도 아니요, 물렁한 것도 아니다.

 

수자타야, 이 생멸하는 모양은 그림자와 같으니,

인연따라 생한 것이 인연따라 없어지는 것일 뿐, 실체가 아니다.

 

수자타야, 이 생멸하는 모양은 이슬과 같으니,

잠시 이루어진 것이긴 하나 속히 없어지는 것 가운데에는 진실한 집을 지을 재료는 없다.

 

수자타야, 이 생멸하는 모양은 밤하늘의 번개와 같으니,

번쩍일 때에는 생이라 하다가 컴컴할 때에는 멸이라 하는 것에는, 의지할 만한 진실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불생불멸’이다.

 

 

유마 김일수 / '유마와 수자타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