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와 똥막대기(도덕경 해설)

도덕경 67장. 큰 까닭에 무엇도 닮지 않은 道

slowdream 2007. 8. 11. 01:43
 

<제 67장. 큰 까닭에 무엇도 닮지 않은 道>


天下皆謂我道大 似不肖 夫唯大 故似不肖 若肖 久矣其細也夫 我有三寶 持而保之 一曰慈 二曰儉 三曰不敢爲天下先 慈故能勇 儉故能廣 不敢爲天下先 故能成器長 今舍慈且勇 舍儉且廣 舍後且先 死矣 夫慈 以戰則勝 以守則固 天將救之 以慈衛之


세상 사람들 모두 나의 道는 크며 그 무엇도 닮지 않았다고 말한다. 무릇 큰 까닭에 닮지 않은 것이다. 닮았다면 오래 전에 작아져 버렸을 것이다. 내게는 세 가지 보물이 있는 바 언제나 지니고 보존한다. 그 하나는 자애요, 둘은 검약이며, 셋은 감히 천하에 앞서지 않으려 함이다. 자애로운 까닭에 용감하고, 검약한 까닭에 널리 베풀며, 천하에 앞서지 않는 까닭에 만물의 으뜸이 된다. 그러나 이제는 자애는 버리고 용감함을 취하고, 검약은 버리고 널리 베풂만을 취하며, 물러섬은 버리고 앞섬만을 취하니, 이는 죽음의 길이다. 무릇 자애로 싸우면 이기고, 자애로 지키면 굳세니, 하늘이 장차 구하고자 할 때도 자애로써 지켜주느니라.



天下皆謂我道大 似不肖 夫唯大 故似不肖 若肖 久矣其細也夫(천하개위아도대 사불초 부유대 고사불초 약초 구의기세야부) 

 

  肖는 ‘닮다, 선하다, 작다, 쇠약하다’ 등의 여러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닮다’가 걸맞을 듯싶다. 그런 즉, 不肖는 사물의 형상을 닮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닮았다면 크다고 형용할 수 없다. 그 어떤 사물의 크기와도 비견할 수 없기에 그저 ‘크다’라고 할 따름이다. 현상계의 상대적 존재인 만물은 생주이멸(生住異滅)의 과정을 겪기에 크고 작음의 형상을 두루 거치나,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無始無終) 자리하지 않는 곳이 없는(無所不在) 道는 달리 표현할 도리가 없다. 그런 까닭에 ‘크다’고 말할 뿐이다. 크고 작음의 분별상을 떠났기에 佛家에서는 “수미산이 겨자씨에 들어가고, 사해 바닷물이 한 터럭 구멍에 들어간다” 고 일갈하는 것이다. 참으로 크지 않은가. 


我有三寶 持而保之 一曰慈 二曰儉 三曰不敢爲天下先 慈故能勇 儉故能廣 不敢爲天下先 故能成器長(아유삼보 지이보지 일왈자 이왈검 삼왈불감위천하선 자고능용 검고능광 불감위천하선 고능성기장) 

 

  儒家의 실천덕목이 삼강오륜이라면, 道家의 실천덕목은 자애와 검약, 천하에 앞서지 않음의 삼보이다. 그리고 佛家의 실천덕목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이겠다. 육바라밀은 보시(布施)ㆍ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ㆍ선정(禪定)ㆍ지혜(智慧)인 바, 자애는 보시, 검약은 지계와 인욕, 천하에 앞서지 않음은 지혜와 닮았다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모두는 ‘머무름이 없는 머무름’인 무위로 귀결된다. 자애가 용감하다는 얘기는,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경구와도 같다. 물론 자식사랑이 지나치다 못해 자식을 망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자애와 검약은 제자백가 가운데 묵자의 겸애(兼愛)ㆍ절용(節用)의 사상과 거의 흡사하다. 


今舍慈且勇 舍儉且廣 舍後且先 死矣 夫慈 以戰則勝 以守則固 天將救之 以慈衛之(금사자차용 사검차광 사후차선 사의 부자 이전즉승 이수즉고 천장구지 이자위지)

 

  그러나 현실은 바람과는 어긋난다. 자애와 검약, 천하에 앞서지 않음의 삼보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그리하여 노자는 삼보가 없는 유위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道에 바탕한 무위는 걸림이 없는 삶의 길이지만, 道에 바탕하지 않은 유위는 시비와 분별로 얼룩진 죽음의 길이다. 舍와 且는 捨와 取로 해석함이 가장 적합해 보인다. 舍와 且를 대구(對句)로 보지 않고 舍가 나머지를 수식하는 것으로 즉 舍儉且廣의 경우 ‘검약함과 널리 베품을 버리고’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의미상 큰 혼선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