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 1083

편지 1

제가 ‘최애’하는 E선생님 반갑습니다. 제가 이런저런 철학자들을 거론하면서 아는 척하는 태도 이면에는 아주 못된 심보가 있습니다. 사실 저는 동양이든 서양이든 철학, 사상, 사유라 일컫는 정신적 행위에 큰 감동이 없습니다. 그 한계가 뚜렷한 까닭입니다. 삶은 ‘생로병사’의 현상적 틀에 갇혀 있지요.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헌데, 사유라는 행위는 ‘생사’를 외면하거나 혹은 신비적 영역으로 던져놓고서, ‘희로애락’만을 대상으로 합니다. 몇 달 전 모임에서 K선생에게 이런 얘기를 슬쩍 짓궂게 건넨 적이 있습니다. “K선생, 이제까지의 모든 사유, 철학, 사상은 말입지, 붓다의 가르침에 비교하자면 놀이터에서 흙장난 하는 아이들 수준이거든.” 아...그때 K선생의 표정이 아주 오묘했습니다. 뭐, 이녀석 아..

라깡, 하이데거, 헤겔 그리고 붓다

정신분석학자이며 철학자인 자크 라깡에게 세계는 3가지이다.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상상계는 거울 단계로 이미지화한 자아가 비로소 출현하지만 세계와 자아를 동일시한다. 상징계는 상상계를 벗어나 언어질서와 사회구조에 편입되는 세계이다. 원초적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이 깨지고, 성숙한 자아와 타자인 세계와의 대립적 관계가 펼쳐지는 의미생성의 장이다. 실재계는 언어 곧 의식, 사유로써는 포획할 수 없는 언어와 사유의 바깥, 무의식의 장으로, 상상계와 상징계의 경계이면서 동시에 그들을 균열시키는 근원적 힘이다. 라깡은 이를 ‘대상 a'’로, 좀더 직관적인 ‘구멍’으로 지칭한다. 상상계와 상징계는 실재계의 ‘구멍’으로 인하여 구조적으로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다는 진단이다. 이는 곧 우리 모두 정신질환인 ‘편집증’과 ..

연기적 존재론과 인식론

연기적 존재론과 인식론  2500여년 전 붓다께서 발견한 진리인 연기법은 오랜 세월 전승되면서 윤색되고 변질되고 더 나아가 왜곡된 상태입니다. 부파불교 대승불교를 거치면서 특히 힌두교 사상과 중국의 현학(노장자), 유학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아 그 정도가 심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중관의 공(空) 사상과 화엄의 법계연기 사상으로 인해서 큰 혼란이 빚어졌습니다. 연기법은 쉬운 듯 어렵고, 단순한 듯 복잡하며 심오합니다. 연기법의 정형구는 이렇습니다.“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것)이 있다. 이것이 발생함으로써 저것(이것)이 발생한다.이것이 없음으로써 저것(이것)이 없다. 이것이 소멸함으로써 저것(이것)이 소멸한다.” 있음과 없음(有無), 발생과 소멸(生滅)은 가장 중요한 인식의 토대이자 관문입니..

윤회 있는가, 없는가?

윤회 있는가, 없는가?  최근 유투브에 몇몇 불교 출가승들이 윤회는 없다라는 주장을 하는 영상이 적지 않게 떠돌아다닌다. 실상사 회주 도법스님과 익산 사자암에 거주하는 향봉스님이 대표적이다. 법륜스님이나 이중표교수도 마찬가지다. 결론인즉, 윤회의 주체 즉 아트만이 없는데 무아윤회라니 가당치 않다라는 얘기다. 윤회라면 당연히 윤회의 주체가 있어야 할 것인데, 불교의 가르침의 핵심이 無我 아닌가. ‘나’랄 것이 없는데 무슨 윤회를 논하느냐, 이런 논지이겠다. 언뜻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윤회는 존재하며, 윤회의 주체는 ‘나’라고 의심하지 않는 정신과 물질, 몸과 마음이다. 즉 실체적 자아인 오취온이다. 무아는 깨달은 자의 세계이며, 윤회하는 범부중생들의 세계는 ‘나, 내 것, 나의 자아..

고통이 성스러운 진실일 수밖에 없는 이유

고통이 성스러운 진실일 수밖에 없는 이유 삶은 그 자체로 모순적 행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살기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죽기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이 참혹한 삶의 아이러니라니. 돈, 사랑, 명예, 건강, 권력 등 모든 것을 쥐었든 일부만을 누렸든 삶은 여지없이 죽음으로 종결됩니다. 죽음을 거부하기 위한 그 어떤 노력도 장치도 무의미합니다. 이러한 삶의 궁극적 의미를 붓다께서는 ‘고통, 불만족’으로 선언하셨습니다. 고따마 붓다께서 전하신 진리는 ‘연기법’이며, 연기하는 법들이 펼쳐지는 현상계의 실상을 ‘4聖諦-4가지 성스러운 진실’로 정리해 주셨습니다. 4성제는 ‘고성제-고집성제-고멸성제-고도성제’입니다. 또한 연기하는 법들의 보편적 성품이 ‘3法印’ 즉 ‘無常, 苦, 無我’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4가지 음식과 알아차림

4가지 음식과 알아차림 존재인 오온을 먹여살리는 4가지 음식이 있다. 단식(團食), 촉식(觸食), 의사식(意思食), 식식(識食). 단식은 육체를 보존하고 성장시키는 물질적인 음식을 말한다. 촉식, 의사식, 식식은 정신적 요소들인 감성(受), 이성(想), 의도적 형성작용(思行), 의식(識)을 보존하고 성장시키는 음식들을 가리킨다. 단식은 고기와 채소 등 다양한 음식으로 경전에서는 험한 곳에서 길을 잃은 부부가 죽은 아들을 음식삼아 생명을 유지한다는 비유로써 단식에 조심할 것을 가르친다. 촉식은 12연기에서의 ‘촉’으로 3사화합을 말한다. 주관인 6내입처와 객관인 6외입처, 그리고 의식. 주관인 감각기능과 객관인 대상(표상), 의식을 먹여살리는 재료라는 뜻이다. 경전에서는 피부가 벗겨진 소가 거친 벽에 등을..

매트릭스와 고통

매트릭스와 고통 삶은 고통, 불만족, 불완전입니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물론 짧게나마 즐거움과 만족, 행복을 누리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으며, 다시금 괴로움과 불만족, 불행이 나를 지배합니다. 4고8고가 있습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生老病死)의 네 가지 고통이 4고입니다. 이는 나를 구성하는 물질과 정신적 요소들인 5온(色受想行識)의 현실적 과정입니다. 전생 업의 과보로 받는 고통입니다. 나머지 4가지는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救不得苦), 오취온고(五取蘊苦)입니다. 이는 현재진행형인 업의 과보입니다. 애별리고는 ‘사랑하는 대상과 헤어짐’입니다. 원증회고는 ‘미워하는 대상과 만남’입니다. 구부득고는 ‘원하지만 구하지 못함..

존재와 자아

존재와 자아 be, exist 삶에 대한 탐구는 결국 존재와 자아에 대한 분석과 이해이다. 신비적 체험의 영역인 종교와 실증적 학문인 과학을 젖혀놓고 얘기하자면, 이는 결국 철학적인 사유의 영역이랄 수 있다. 합리적인 이성과 추론으로써 삶의 지도, 즉 세계, 자아, 존재를 규정하고, 그 구성원리와 전개, 의미와 가치를 그려나간다.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지만, 철학적 사유는 라깡, 들뢰즈, 데리다 등이 포진한 현대철학에서 정점에 이르렀고, 삶의 지형 구축에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존재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로는 be, have, exist, consist, subsist...등이 있는데, 어떤 맥락에서 존재를 이해하느냐에 따라 쓰임새가 다르지만, be와 exist에 주목해 본다. 실존주의철학자이..

초월적 신비 체험

신비체험 양자역학, 천체물리학, 뇌과학, 인지심리학 등등 가히 과학의 시대입니다. 하지만 정신적 차원의 문제는 여전히 신비의 영역입니다. 또다른 세계와 존재들, 윤회 또한 마찬가지겠지요. 물론 지혜가 좀더 성숙해지면 어렵지 않게 해결될 거라 믿습니다. 지혜가 어느 정도 자리잡기까지는 붓다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또한 체화하는 과정이 필수입니다. 인식론적 전환(교학의 철저한 이해)와 존재론적 전환(수행을 통한 인격적 탈바뀜)이 바로 그것입니다. 일상적인 삶의 태도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분들은 예외없이 초월적 신비적 체험을 겪습니다. 초월적 신비적이라는 규정은 무지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세상사가 그렇듯, 모르면 어렵고, 알면 쉽습니다. 저 또한 보통 사람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다양한 신비체험을 겪..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닐스 보어. 하이젠베르크. 쉬레딩크...대중에게 익숙한 유명 양자역학자들이 동양철학에 매료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현장. 이 책은 1970년대에 출판되었고 한국에는 10여년 후에 번역출판되었기에 시차는 꽤 있지만, 동시대 미국, 2차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 등의 참혹한 현실을 목도한 '히피' '비트 제네레이션' 등에서 '신과학운동, 동양적 명상'이 일어난 계기와 맞물려서 전세계적인 센세이셔널한 주목을 일으켰다. 이 저작 이후에 '초끈이론'과 보다 정교화된 '입자스핀'이 등장했지만, 저자의 집필의도가 훼손될 무엇은 없다. 힌두교, 불교, 도교, 유교...하다못해 주역의 이치까지 더듬는 수준이지만,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대승불교를 꿰뚫고 붓다 초기의 가르침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한다는. 그럼에도 ..